“아들 녀석은 내가 실험하고 있는 모습과 빚쟁이가 집에 찾아와 고함치는 것만 보면서 컸어요.”

국내 원액기업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김영기 휴롬엘에스 회장(63)의 얘기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원액기 사업에 뛰어들어 한길을 달려 왔다. 휴롬엘에스의 지난해 매출은 1700억원. 동종업계 국내 1위다. 올해는 웰빙바람에 홈쇼핑채널까지 진출하면서 300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유사 상품이 줄지어 나오고 있지만 ‘원조’ 브랜드인 휴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바로 김 회장의 끈질긴 개발 열정 덕분이다.

그는 햇수로 38년째 저속착즙방식(SSS·Slow Squeezing System)의 스크루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기존 주스기나 믹서기가 채소·과일을 고속으로 가는 과정에서 맛과 영양을 훼손시키는 것과 달리 그가 만든 스크루는 갈지 않고 지그시 눌러 짜는 게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료 본연의 맛과 향, 색깔과 영양분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김 회장이 개발한 이 기술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2010년 프랑스 가전업체 테팔이 “회사를 팔거나 안 되면 판권이라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의 명함이 ‘회장·발명가’로 표기돼 있는 이유다.

김 회장이 이처럼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하게 된 밑거름은 2000번이 넘는 실패였다. 젊었을 때 부산 엄궁동 농산물 도매시장 상인들 중 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주일에 두세 번씩 나타나 짓무른 과일과 채소를 한 트럭씩 사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상한 주스를 파는 악덕업자라고 소문이 났어요. 아무리 실험용이라고 말해도 믿지 않았죠.”

그가 짓무른 작물을 사들인 이유는 스크루 마모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과일과 채소를 갈아야 하는데 비싼 신선제품을 갖다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2000여개의 스크루가 불합격 판정을 받고 폐기됐다.

예나 지금이나 김 회장의 하루 일과는 스크루로 시작해서 스크루로 끝난다. 회전축의 나선면이 돌아가면서 묵직하게 누르는 힘이 발생하는데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과일즙을 짜낼 수 있을지, 소비자가 더 편리하게 사용하려면 어떤 기능이 필요할지를 고민한다. 그는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은 채 잠이 들면 새벽 4시에 어김없이 깨어나 집안에 마련한 작은 연구실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회사를 이 정도 규모로 키우기까지 말 못할 고충도 많이 겪었다. 첫 번째 위기는 1994년 출시한 ‘오스카녹즙기’가 조금씩 팔려 나가던 시절 타사 녹즙기에서 중금속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일명 ‘쇳가루 녹즙기’ 파동은 녹즙기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회사를 파산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갔다. 녹즙기라는 이름을 ‘생즙기’나 ‘솔잎도 갈아주는 녹즙기’라고 바꿔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채권자들은 날마다 집과 회사에 찾아왔다. 한 차례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그렇게 5년여를 버텼지만 한계를 절감했다. 어떻게든 판로를 뚫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들 재원씨를 전략기획실장으로 불러들였다. 자신이 문외한인 인터넷 마케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에도 채권자들과의 입씨름은 계속됐다. 물건이 좀 팔릴 만하면 빚 상환 독촉을 받았다. 이 와중에 총판일을 담당하던 직원들이 퇴사 후에 따로 회사를 차려 유사품을 만드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수십번의 재판을 거쳤지만 이들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마침내 기다리던 효과가 나타났다. 공동구매한 소비자들이 인터넷에 제품 사용 후기를 올리자 홈쇼핑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2009년 GS홈쇼핑의 첫 방송을 탄 날 30대가 팔렸다. 그 다음엔 50여대, 100대 등으로 점점 늘어나더니 방송 시간대도 시청률이 높은 시간으로 바뀌었다. 1994년 이후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던 회사 매출이 15년 만에 비약적인 상승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해외 주문도 폭발했다. 수출선이 40여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지난해 처음으로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을 앞질렀다.

김 회장은 자신의 성공 과정을 ‘인내와 희생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쇳가루 녹즙기’ 파동 때뿐 아니라 크고 작은 고비 때마다 “내가 개발쟁이인데 이거 아니면 뭘 하겠느냐”며 “죽기살기로 매달렸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 기업인들을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자신이 잘하는 걸 끝까지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생의 참된 즐거움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김해=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