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쪽으로 비스듬한 열차의자의 비밀
영국 히드로공항에서 런던 중심부인 패딩턴역으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는 것이다. 소요시간은 15분.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열차들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테이블이 의자 앞이 아닌 옆에 있다. 짧은 탑승시간에 테이블을 이용해 업무를 보는 이들은 적은 반면 공간을 넓게 확보해 다리를 쭉 뻗고 쉬고 싶어하는 고객이 대부분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의자 방향도 창쪽으로 살짝 틀어져 있다. 창문 밖 경관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뿐만 아니다. 심심하지 않도록 아마존의 전자책 리더기 ‘킨들’을 빌려주기도 한다. 승객들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알찬 15분’을 보낼 수 있다.

영국 디자인회사 탠저린이 설계한 히드로 익스프레스는 ‘서비스 디자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서비스 디자인이란 제품처럼 ‘보이는’ 것을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의료, 교통, 관광, 통신 등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소비자 편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의 일상을 확 바꿀 수 있는 ‘서비스 디자인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유럽이 가장 앞서 있다. 서비스 디자인은 ‘소유’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트렌드다. 단순히 시각적인 만족을 주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오감을 충족시키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영국 디자인회사 이데오(IDEO)와 손잡고 ‘잔돈은 넣어두세요(keep the change)’라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고객들이 물건 값을 결제할 때 전체 금액 중 달러 이하 단위를 반올림한 뒤 그 차액을 예금계좌로 이체해주는 방식이다. 예컨대 커피전문점에서 3달러50센트짜리 카페라테를 사고 4달러를 내면 50센트를 계좌에 돌려준다. 고객들은 더 이상 물건을 사고 남은 거스름돈을 저금통에 모아 두었다 은행에 저축하러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페인 통신회사 텔레포니카는 현지 디자인회사 모메디를 통해 헬스케어 시스템에 서비스 디자인을 접목시켰다.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의사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집에서 간단히 혈압 측정을 한 뒤 수치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송하면 의사가 처방을 내려준다. 환자들은 병원에 가지 않고도 편리하게 진단받을 수 있다.

제이미 모레노 모메디 최고경영자(CEO)는 “서비스 디자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업, 문화 트렌드, 고객 성향 등을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며 “앞으로 이 분야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용 한국디자인진흥원장은 “한국에선 아직 서비스 디자인이 보편화하지 않았다”며 “연내에 서비스 디자인 전담팀을 구성하는 등 발전을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런던/마드리드=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