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의 흥망성쇠


80년대 대출수요 늘며 '떼돈'
동일인 여신 확대 등 규제 풀려…저축은행 이름 달고 덩치 키워


외환위기로 4년간 109곳 문닫아
PF로 흥하다 PF로 '직격탄'…대주주 전횡까지 겹쳐 추락
은행을 꿈꿨던 '서민 저금통'…탐욕과 감독 부실, 몰락의 길로

은행을 꿈꿨던 '서민 저금통'…탐욕과 감독 부실, 몰락의 길로

1980년대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기였다면 저축은행들에는 그야말로 ‘전성시대’였다. 당시 상호신용금고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펼쳤던 저축은행들은 떼돈을 벌었다. 돈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당연히 영업은 땅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웠다. 저축은행업계의 연평균 성장률은 30%를 넘나들었다. 1981년 7998억원이었던 저축은행업계 전체 자산 규모는 1990년 11조4548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문을 닫고 KB금융지주로 인수된 제일저축은행이 그때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제일저축은행의 이익 규모는 대한민국 전체 기업을 통틀어 10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1247억원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나 지금은 구속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유동천 전 제일저축은행 회장은 만인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그랬던 저축은행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올해로 출범한 지 40년이 된 저축은행은 사금융을 양성화하겠다는 정부 의지로 탄생했다. 1972년 상호신용금고법이 제정되면서 첫해 350개 저축은행이 영업을 시작했다. 태동기인 1970년대는 다소 어설펐다. 금융당국의 규제도 그렇고 회사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줄줄이 퇴출 명단에 올랐다. 저축은행은 191개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82년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로 불렸던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다. 이들 부부는 일신제강 동일토건 등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에 대출을 해주고 이 돈의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았다. 이렇게 받은 어음을 유통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6404억원을 챙겼다. 기업들이 연쇄도산했고 증시는 폭락했다. 사채시장은 마비됐다. 중소기업과 서민에 자금을 융통해주는 저축은행의 역할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는 제2금융권 활성화 방안을 내놨다. 새로 58개 저축은행 설립을 허가했다. 1983년 소규모기업에 1억원이었던 동일인 여신 한도가 1989년에는 5억원으로 확대됐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도 좋았다.

저축은행으로 돈을 벌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도 나왔다. 지금은 HK저축은행으로 흡수된 영신상호신용금고의 김일창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서울 청계천 8가에 영신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하고 마장동 도축상인과 동대문 일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업계 3위까지 회사를 키웠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하다가 1987년 검찰에 이중장부 작성(부외 거래) 사실이 적발돼 5년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영신상호신용금고는 국민은행에 넘어가 부국상호신용금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민·중소기업 자금 공급 순기능

1990년대도 외환위기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저축은행은 1990년대 초반까지 서민 가계대출의 43%를 담당할 정도로 역할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가혹했다. 1998년부터 4년간 109개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 업계 수위를 다투던 부국상호신용금고는 부실이 커지면서 HK저축은행(옛 한솔저축은행)으로 합병됐다.

업계에서는 국내가 영업기반인 저축은행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을 들이대며 ‘살생부’를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했지만 허사였다. 시중 은행조차 연이어 문을 닫는 판국이었다. 저축은행의 목소리를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멀쩡하던 회사가 갑자기 나자빠지기도 했다. 사채업자로 유명한 이른바 백할머니가 세운 우풍상호신용금고가 쓰러져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우풍상호신용금고는 2000년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기업 성도이엔지에 15만주 공매도 주문을 냈다가 2만주밖에 되사지 못해 결국 망하고 말았다.

○문제 덮기에 급급했던 금융당국

시간이 흐를수록 영업 환경은 악화됐다. 1998년 은행의 여신금지제도 폐지가 직격탄이 됐다. 그 전까지 은행은 골프장 콘도 주점 대형식당 사우나 등에는 대출을 해 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업종이 주로 영업을 하는 건물 등은 담보로 잡을 수도 없었다. 저축은행으로서는 안방을 빼앗긴 형국이었다. 저축은행업계는 지속적으로 규제 완화를 부르짖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영업정지를 받은 솔로몬저축은행의 임석 회장이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 임 회장은 부실사를 떠맡는 등 금융감독당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업계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수완을 보였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2002년에는 저축은행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동일인 여신한도는 80억원까지 늘어났다. 금융당국은 부실 저축은행을 인수할 때는 지점을 추가로 낼 수 있도록 해주고 검사를 받지 않도록 하는 등 각종 혜택을 줬다. BIS 비율 8% 이상, 고정이하 여신비율 8% 이하라는 이른바 ‘8·8클럽’제도를 만들어 여기에 들어간 저축은행의 신용대출을 늘려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2003년 가계 신용위기가 심화되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되돌아보면 대형 부실의 씨앗이었다. 금융당국은 제대로 된 검사도 하지 않고 당장의 문제를 덮는 데 급급했다. 대주주의 전횡이 심각하다는 것도 짐작만 할 때였다.

○황금알 낳던 PF가 부메랑

2000년 중반부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떠올랐다. 현재 담보가치보다 부동산 개발 이후 담보가치를 주목해 대출을 해주는 부동산 PF는 30% 이상의 수익률을 가볍게 넘겼다. 골드상호신용금고가 전신인 솔로몬저축은행은 여신액 2조원 중에서 PF 대출이 1조원에 달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2008년부터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자 PF 대출에 발을 담근 저축은행들은 대책없이 무너졌다. 결국 작년 상반기에 8곳, 하반기에 8곳이 무너졌다. 지난 6일 새벽 6시에는 솔로몬·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이 영업정지를 당했다. 여기에 대주주 비리까지 겹쳤다.

삼화저축은행을 시작으로 지난해 영업정지된 16개 저축은행 대주주 대부분은 법의 심판을 받았거나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이다. ‘탐욕에 젖은 실패한 경영인’이란 낙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저축은행 구조조정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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