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 절반 줄이고 체력 보강…M&A통해 5대 종합상사로 '우뚝'
2000년 4월 일본 종합상사인 이토추(伊藤忠) 본사의 전략회의실. 불꺼진 방에 혼자 남은 니와 우이치로(丹羽宇一郞) 회장이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시간 전 차세대 성장 사업과 관련해 임원들과 열띤 논쟁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경쟁사인 미쓰비시와 미쓰이상사가 잇따라 러시아와 브라질의 대규모 천연가스 사업에 투자한다고 발표했지만 이토추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잠시 뒤 굳은 표정의 니와 회장이 뭔가를 결심한 듯 계열사 임원진을 회사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이 시간부터 이토추는 에너지·자원 투자회사로 탈바꿈한다. 에너지·자원 분야에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는 모두 인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투자도 공격적으로 할 것이라고 했다. 성장 모멘텀을 찾지 못해 3류 회사로 전락할 뻔했던 이토추가 일대 변화를 시작한 순간이었다.

◆ 과감한 구조조정과 변신

이토추는 1990년대 후반 위기를 맞았다. 1990년 중반 이후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부동산은 거품 붕괴로 직격탄을 맞았다. 제조업체들이 직접 수출시장에 뛰어들면서 수출업무 대행 사업은 점차 축소됐다. 회사를 지탱하기도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토추는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1998년 1000여개에 달했던 자회사를 459개로 대폭 줄였다. 니와 회장은 월급은 물론 상여금과 수당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재계 최초의 ‘무급(無給) 선언’이었다. 정년이 지났어도 특별고문 등의 직위를 갖고 회사에 남아 있던 임원들도 내보냈다. 구조조정에 익숙지 않고 고용 안정을 중시하던 일본 재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를 통해 이토추는 4000억엔에 달했던 부실 자산을 2년 만에 전부 털어냈다. 신사업을 위해 몸을 가볍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회생에 성공한 이토추는 2000년부터 공격에 나섰다. ‘에너지·자원 분야 진출’과 ‘인수·합병(M&A)’이 핵심 전략이었다. 2001년엔 인도네시아의 바츠 히자우 광산에 출자했다. 일본 종합상사 중 처음으로 동(銅)광산 투자에 성공한 것.

그러나 첫 자원개발 투자는 난항에 봉착했다. 2003년까지 구리가격이 계속 떨어졌다. 차입금 상환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내에서는 지분 일부를 팔자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이토추 경영진은 기다릴 줄 알았다. 장기적으로 구리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판단, 지분을 유지했다. 예측은 적중했다. 2004년부터 구리가격이 상승, 이익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2001년에는 마루베니(丸紅)상사와 함께 러시아 사할린의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 사업에 참여하며 에너지 투자기업으로 본격 변신하기 시작했다. 2003년 브라질 철광석 업체인 발레 주식을 1000억엔어치 매입했다. 철광석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발레는 투자 당시 순이익이 6억달러에서 현재 1000억달러를 넘는 우량 기업으로 변신했다.

자원 투자가 이토추에 큰 수익을 안겨주기 시작한 것은 상품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2007년부터다. 투자한 철광석과 석탄 광산 등에서 이익이 급증, 2007년 한 해 에너지·자원 부문의 순이익이 처음으로 1000억엔을 돌파했다. 전체 순이익은 2185억엔이었다.

올초 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일본 산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토추의 1분기(4~6월) 매출은 2조8610억엔으로 전년 동기(2조7290억엔)에 비해 4.8% 증가했다. 해외 에너지 자원에 적극 투자한 덕분이다.

◆ 해외 지사가 M&A 1차 판단

이토추가 에너지·자원 투자회사로 변신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해외 지사들이었다. 이들은 M&A의 첨병이자 주력군이었다. M&A를 위한 정보 수집은 물론 장기적으로 돈이 될 회사인지에 대한 판단도 지사의 몫이었다. 본사는 해외 지사의 판단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M&A가 시작되면 실사도 맡았다. 수십년간 현지에서 쌓은 노하우와 인맥을 활용, 잠재 부실을 찾아내고 적정한 가격을 산정했다.

지난해 회장에 취임한 고바야시 에이조(小林榮三) 사장은 “해외 지사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풍력과 지열 전기자동차 등 에너지 관련 신성장동력 분야로 거침없이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해외 지사의 노하우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이토추의 기업문화는 군대 조직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역한 장교를 대거 채용하면서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갖춘 영향이 크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다양한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본사로 보내는 것도 군대와 비슷하다. 산케이신문은 “이토추는 군대와 같은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수집한 정보를 이용해 섬유 수출업체에 불과했던 회사를 일본 5대 종합상사로 키워냈다”고 평가했다. 이 정보망을 통해 이토추는 1967년 중동전쟁이 6일 만에 끝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 ‘돈 되면 다 한다’, 또 다른 변신

요즘 이토추는 2차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 분야 경쟁이 포화 상태에 달했다고 보고 투자처를 신재생에너지와 식품·정보기술(IT) 등으로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토추는 지난 4월 다른 종합상사를 제치고 세계 최대 규모 풍력발전소 건설 사업에 참여했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추진하는 풍력발전 사업에 20억달러(2조1000억원)를 투입한 것이다.

또 2차전지의 원료가 되는 리튬 투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하 열수(熱水)에서 리튬을 대량 채취하는 기술을 보유한 미국 자원개발 업체에 출자한 것. 휴대전화와 노트북뿐 아니라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 등의 리튬 수요가 급증할 것을 겨냥한 것이다.

이토추는 성장하는 중국 시장에도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식품회사인 팅싱지주사 지분 20%를 7억1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지난 8월엔 상하이 소재 TV홈쇼핑 회사인 ‘러파이’(樂拍·LuckyPai)를 인수했다. 고바야시 회장은 “중국의 개인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면서 기회의 땅이 됐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종합상사들은 돈이 되면 어떤 사업이라도 진출하는 ‘다보하제(ダボハゼ·검정망둥이) 경영에 나서고 있다”며 “이토추는 두둑한 실탄(자금)을 바탕으로 다보하제 경영을 해 성공한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