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장수(長壽) 리스크'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쓰인다. '오래 살 위험'이라니,불로장생(不老長生)을 염원한 진시황이 듣는다면 이해 못할 소리다. 하지만 요즘 다수의 평범한 한국인들은 이 역설적 표현에 공감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가(喪家)에 가서 고인이 여든 살을 넘었다 하면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적어도 아흔살은 넘어야 그런 인사가 어색하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11년 세계보건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남성이 76세,여성은 83세다. 유엔 통계로 보면 2005~2010년 한국인들의 평균수명은 78.2세로 20년 전에 비해 8.4년 늘어났다. 바이오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의사의 말처럼 지금 개발 중인 신약들이 예정대로 출시된다면 2020년께는 불치병들이 정복돼 사고사가 아니면 모두 90세 이상 살지 모를 일이다. '100세 시대'는 결코 먼 미래가 아니다.

'장수 리스크'란 생각보다 오래 사는 바람에 생기는 예기치 못한 문제들을 말한다. 얼마 전에 들은 어느 집안의 얘기다. 자녀가 4명인데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나니 부모가 쓸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집 한 채가 있어 부모는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를 생활비로 썼다. 그런데 부모는 비슷한 연령대 어르신들보다 오래 사셨고,넉넉할 줄 알았던 노후자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자녀들은 다시 부모에게 집을 장만해 드렸고 부모는 전세금을 찾아 생활비로 쓰고 있다. 이 가정은 자녀가 4명이나 되고 다들 자리를 잡은 터라 큰 무리없이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퇴직 때까지 자녀양육에 '올인'하면 나중에 자녀가 내 노후를 책임져 줄까. 요즘엔 그저 자녀가 사회에 나가 자립할 수 있으면 고마울 따름이라고 한다. 2000년만 해도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자녀가 부모의 생계를 돌봐야 한다'는 의견이 70.7%에 달했지만 지난해엔 30.6%로 낮아졌다. 효(孝)를 강조한다고 달라질 일은 아닌 듯싶다.

결국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노후생활을 할 수 있게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본지가 최근 '100세를 위한 습관,장기투자'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미래에셋퇴직연구소와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70%는 집값과 교육비,고물가 때문에 노후준비를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은퇴 빈곤층'은 사회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따라서 '100세 시대' 준비는 정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차피 '복권'인데 당첨금만 나눠 지급한다고 '연금'이란 이름을 붙여 서민들을 현혹시키지 말고,개인들의 노후 대비 자금 마련을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연금 등 장기투자상품에 대한 세제혜택 확대는 호주 등 소위 연금 선진국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조언하는 내용이다. 정부의 직접 지원은 저소득층에만 집중하고,어느 정도 능력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준비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100세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미국 희곡작가 테네시 윌리엄스가 말했듯이 "돈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다. 그러나 돈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 " 내일부터 한가위 연휴다. 은퇴 후 명절날 가족들이 모였을 때 손자,손녀들에게 용돈이라도 넉넉히 쥐어줄 수 있는 여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세워 준비해야 한다.

박성완 증권부 차장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