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주교 서임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다음해 1월 황제는 교황이 머물던 카노사성 앞 눈밭에서 사흘간 용서를 구했다. 완승한 듯했던 교황은 그러나 황제의 반격으로 추방돼 도피처에서 숨을 거뒀다

10여년 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왕권에 밀려 추락한 교황권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승부수를 던진다.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聖戰) 호소가 그것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이교도와 싸워라.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종교를 명분으로 한 기득권 싸움에 의해 시작됐다. 성지 회복을 구실로 동방정교회를 로마가톨릭에 흡수시켜 교황권을 확장하려는 교황의 갈망과 미지의 땅을 얻으려는 서유럽 영주들의 욕망,상인들의 시장 개척 욕구에 대중의 신앙적 광기까지 뒤얽혀 전쟁은 장장 200여년간 지속됐다.

'다빈치 코드' 등 소설과 영화에 성배 수호를 위한 비밀결사단처럼 나오는 템플기사단은 바로 이 십자군 전쟁의 산물이다. 1118년 결성된 기사단은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을 입고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를 비롯한 기독교 성지 수호를 위한 전투에 앞장섰다.

전방의 승리와 후방의 금융업 성공으로 막강해졌던 템플기사단의 세력은 성지를 잃으면서 기울었다. 게다가 기사단에 진 빚을 갚기 싫었던 프랑스왕 필리프 4세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1307년 10월 일제히 체포 당해 고문받은 데다 1312년 교황으로부터 강제 해산당했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대규모 연쇄 테러가 템플기사단의 후예를 자처하는 극우 기독교 원리주의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의 무슬림 증오 범죄로 드러났다는 소식이다. 적도 아닌 자국민 그것도 청소년들을 향한 무차별적 살상은 잘못된 신념과 광기 어린 믿음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도 남는다.

'다문화 포비아(공포)'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난이라고 한다. 양극화에 따른 사회적 박탈감에 인종주의와 종교적 망상이 결합되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자비한 범행으로 돌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노르웨이의 무슬림 인구 비율은 2% 미만이다. 우리의 다민족 비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남의 일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