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실종 패션, 남성 시선과 여성 시선의 차이

‘야한 여자가 좋다.’

이 말은 남성의 시각에서 표현한 것이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성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야하다’는 관점에 대해서다. 여성들은 요즘 흔히 말하는 ‘하의실종’ 패션이나 초미니스커트 등을 입을 때 이를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개성적인 자기표현이라고 말한다. 멋지니까 그냥 입는다고 한다.

둔부를 겨우 가릴 정도의 미니스커트(이른바 나노 미니스커트)나 하의실종 패션을 멋있어 보이기 위해 입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시선이다.

남성들이 흔히 말하는 ‘야한 여자’는 시각적인 것을 전제한다. 보지 않으면 야하다는 느낌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시각적인 것의 본질은 포르노그래피적이라고 한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시각적인 것은 결국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매료되게 만든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쓴 ‘보이는 것의 날인’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글의 맨 처음에 등장한다. 우리 사회가 시각 문화의 홍수에 살고 있는데, 이 말은 바로 그 시각 문화와 세계의 존재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시각적인 것이 우선시되면서 다른 감각들이 고갈되는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시선의 우생학’에서 알 수 있듯이 찰나의 순간을 잡기 위한 무한 경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시선은 욕망의 메타포이며 욕망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유포하는 ‘욕망의 판타지’

지나친 편견일지 모르지만, 요즘의 ‘하의실종’ 패션에서는 넋을 잃을 정도로 매료하게 만드는 게 없는 것 같다. 섹슈얼리티나 절제미, 미적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함을 줄 뿐이다. 심지어 ‘시각적 폭력’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때로는 이를 쳐다보기조차 민망하다. 한번은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과 상담을 하는데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상담 내내 난감했던 적이 있다. 이는 상담자를 배려하지 않는 패션이다. 여성들은 패션이 개성적인 자기표현이자 만족이라고 하지만 상담을 할 때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도 필요하다. 포털사이트에서 ‘하의실종 종결자 등극’에 낚여 클릭해보면 혐오감마저 든다.

‘종결자’의 주인공은 이른바 ‘시선의 우생학’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어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몸값을 높이려는 연예인이기에 그럴 수 있을 테지만 학생들까지 이를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패션에서는 몸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몸을 보호하는 사용 가치와 함께 최근에는 ‘몸의 권력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섹슈얼리티라는 이른바 ‘기호 가치’가 중시되고 있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은 이 기호 가치를 더 높여 몸의 권력화를 강화하기 위해서일 게다.

하의실종 패션이나 ‘나노 스커트’ 패션은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소비’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차이는 결국 여성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종국에는 전체주의화되면서 차이를 없게 한다. 그럴수록 더 차이 나는 패션을 하기 위해 더 짧아지는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하의실종 패션, 남성 시선과 여성 시선의 차이

임철규(전 연세대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 따르면 남성의 시선은 권력을 상징한다. 남성의 시선은 폭력적이고 심지어 제국주의적이라고까지 한다. 남성의 눈은 욕망을 추구하는 힘 그 자체라고 한다. 로마의 시인 바로(Marcus Terentius Varro)는 “눈의 지각이 뿜어내는 힘은 별들에도 이른다”고 했다. 바로는 사냥꾼 악타이온이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눈으로 범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나는 본다’에는 ‘눈으로 범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음욕을 충족한다’라는 말도 있다.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그 대상을 소유해야 한다. 제국주의 역사도 여기서 비롯된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멸한 것도 금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는 눈과 눈의 죄악, 단죄가 자주 나온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대부분 눈 때문에 악마적 행위가 일어난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시작됐다. 파리스가 미모의 헬레네를 보지 않았다면 트로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도 바로 눈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요즘 유행하는 미니스커트나 하의실종 패션은 자본과 그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경영되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걸그룹, S라인, 킬힐 등은 모두 우리 시대의 미디어가 유포하고 소비하는 ‘욕망의 판타지’ 혹은 ‘판타지의 욕망’들이다.

하의실종 패션이나 초미니스커트의 유행 역시 자율적인 주체들을 통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겨났다고 착각하게 할 뿐이다.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타자’라고 한다. 대중에게 모방해야 할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자’ 혹은 ‘자아 이상(ego ideal)’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스타급 연예인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대중스타, 광고 안의 탤런트나 배우, 그리고 광고 속의 상품이 자아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타자 혹은 자아 이상은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모방과 함께 차이 나는 소비를 부추기는데 대중은 이를 알면서도 복종하고 동참한다. 수많은 여성이 하이힐은 신체적인 ‘고문’이라고 부작용을 지적해도 하이힐 신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들은 S라인과 킬힐, 하의실종 패션과 같은 과도한 이미지의 섹슈얼리티에 사로잡히고 있다. 모델을 통해 이러한 패션에 대한 모방 욕구를 자극받을수록 그것의 ‘향유’보다 ‘억압과 배제’를 경험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섹슈얼리티로부터 소외’인 셈이다.

외신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포르노 소비국 1위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정력이 왕성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시각 문화와 그 자본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포르노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시각적 자극에 예민한 남성의 본능적 속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여성들은 시각보다 청각에 예민하기 때문에 시각적 자극을 강조하는 포르노에 흥미가 없다. 남자와 여자는 이러한 성 본능의 차이 때문에 서로 오해를 낳기도 한다.

시각 문화의 홍수 속에서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로부터 소외를 경험한다면 남성들은 포르노그래피로부터 소외를 경험한다. 일반인은 대부분 포르노의 모델처럼 재현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남성들은 모두 ‘준(準) 발기’ 상태에서 욕망의 포로에 강박당한 채 지쳐가고 있다고도 한다. 이 모두가 자본을 욕망하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시각 문화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결핍’과 ‘부족감’을 느끼게 해야 모방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핍을 부추기는 것은 결국 자본이다.

하의실종 패션, 남성 시선과 여성 시선의 차이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피투체, 즉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미디어가 ‘호명’하는 상품이 소비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미디어에 의해 내던져진 존재’가 된다. 미디어라는 렌즈가 만든 객체(상품과 욕망)를 모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대학 캠퍼스를 걷다 보면 고가의 명품 핸드백이나 명품 로고가 찍힌 쇼핑백에 책을 넣고 다니는 여학생도 있다. 이게 자본에 굴복하는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풍경’ 하나를 꼽으라면 여대생들의 이해할 수 없는 패션이다. 도서관에서조차 ‘나노 미니’를 입는 여학생들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대생이란 등교할 때는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명품 핸드백 대신 책이 든 가방을 멘 모습이 아닐까. 남학생들은 그런 여학생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CAMPUS Job & Joy 2011년 7월호 제공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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