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일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경험이다. 미식축구 표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 체육관 앞 매표소로 갔다. 매표소 앞에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오전 9시 수업시간은 다가오는데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앞이나 뒤에 늘어선 미국인 학생들은 느긋한 표정으로 책을 읽거나 서로 소곤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다리다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나버렸다. 기다린 게 아까워 중간에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옆에 있던 미국인 학생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매표소 창구를 하나 더 만들면 줄이 반으로 짧아지고 시간도 뺏기지 않을 텐데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실용주의를 내세우는 그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조용히 듣던 그 학생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게 바로 인내심을 배우는 서구의 방식이야."

인내심이란 단어가 강한 인상으로 뇌리에 들어왔다. 실제로 미국 사회에선 어디를 가도 줄서서 기다려야 했다. 햄버거를 사려고 해도 줄을 서고,레스토랑에 가서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작가인 스타인벡은 "미국 사람들은 하루의 3분의 1을 기다리는 데 소비한다"고 했다.

은근과 끈기라면 우리 국민도 그들 못지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줄을 서서 기다리지 못한다. 도로에서 틈만 나면 끼어들고 꼬리물기로 체증을 유발한다. 넓은 고속도로도 주행선과 추월선의 차이가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고속승진을 꿈꾼다. 재산 증식도 비슷하다. 한 푼 두 푼 모으기보다는 복권에 당첨되는 일확천금의 꿈을 꾼다.

왜 그럴까. 인내심이 없어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 근무하는 미군 가운데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휴가를 나왔다가 택시를 타고 부대로 돌아가는 미군 사병 중에는 요금을 안 내고 도망가는 저질도 있다. 그런 그도 부대 안에선 정확하게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모범군인일 터이다.

상황에 따라서 행동양식이 달라지게 만드는 속내는 뭘까.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찬까지 듣고 숭늉을 먹어도 순서를 따지던 장유유서의 나라였다. 그런 우리가 조급하게 된 것은 기다림에 대한 대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극장 앞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섰어도 중간에 끼어든 암표장사의 농간으로 영화를 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온 청약자는 투기꾼들 농간에 울분을 터뜨리는 일도 흔했다.

차례를 기다려도 그 열매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가로채 가는 사회였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줄을 서면 손해라는 잠재의식이 자리잡은 것 같다. 느긋하게 줄을 서서 기다려도 내 차례가 오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공정한 세상이다.

신영무 < 대한변호사협회장 ymshin@shink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