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인생이라는 무대

신문 한 귀퉁이에 이름이 낯익은 한 장군의 부음이 작게 실려 있었다. 필자가 젊은 시절 전방에서 법무 장교를 지냈을 때 사단장을 지냈던 분이다. 위세가 대단한 장군이었다. 군단장으로 서울지역의 방위를 담당했고 전두환 측에 서서 12 · 12 사태를 주도한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그에게 중앙정보부장을 제의했었다. 당시 그는 모든 부하 장교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권력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화상을 입고,너무 멀리 있으면 추운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거리에서 온기 정도만 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혁명에 성공한 군인으로서 권력욕을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을 세상은 결코 그냥 놔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장관까지 되면서 권력의 중심부로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들의 혁명은 군사 반란으로 바뀌었다.

그는 법정의 피고인석에 섰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고위직까지 올라가더니 이번에는 우물의 제일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법무 장교였던 나를 소개하고 "왜 권력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침묵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저 세상으로 갔다. 그의 영결식장은 적막했다. 그가 붉은 별판을 단 검은 차를 타고 움직이면 수만명의 부하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위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영정 아래 구석에는 국화 바구니가 보였다. 달린 이름들이 낯익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들은 이제 모두 역사의 저편으로 가고 있었다. 영정 속에는 머리가 하얀 노인이 가냘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보였다. 그는 저쪽 세상에서 적막한 영안실을 내려다보며 허무한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 같았다. 모든 지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잠시 입었다 벗는 옷에 불과하다. 하고 있는 역할들도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잠시 맡고 있는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면 각자 무대에서 내려와 분장을 지우고 화려한 의상을 벗어버린 보통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 같은 신은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아이를 집으로 불러들여 편안히 자게 한다. 아이들은 낮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전쟁놀이의 역할들을 못내 아쉬워한다.

신 앞에서 그런 다섯 살짜리 아이와 여든 살 노인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관 뚜껑을 덮을 때 그동안 누렸던 지위나 재산은 모두 이승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일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서늘한 느낌을 주던 묘지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장소로 변해간다. 각 봉분마다 누군가 와서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영안실도 마찬가지다. 찾아가는 모든 이는 죽은 이 앞에서 한 조각의 따뜻한 마음을 흘려보낸다. 그 사랑과 따뜻함을 좀 더 일찍 생전에 전달한다면 인생이라는 무대,즉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신영무 < 대한변호사협회장 ymshin@shinki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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