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사실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것도 흔치않다. 거물들의 싸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웬만하면 말리기보다는 구경꾼으로 남아 싸움을 즐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삼성전자LG전자가 3D(입체)TV 기술을 놓고 벌이는 다툼도 그런 경우다. 올초 "궤변을 늘어놓는다","사기를 친다"는 거친 표현이 등장할 만큼 두 회사의 싸움은 격렬했다.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 비난을 자제키로 했다지만,다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두 회사는 심심찮게 자사 제품은 띄우고 상대방은 끌어내리는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왜 싸움을 벌이는 걸까. 3D TV와 3D 디스플레이 패널을 놓고 글로벌 시장 전역에서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라이벌인 두 회사가 지금 벌이고 있는 싸움 속으로 들어가보자.

싸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3D 영상을 구현하는 방식의 차이다. 삼성이 택한 셔터글라스(SG) 방식(또는 액티브 방식)은 반도체가 내장된 3D 안경이 TV와 신호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왼쪽과 오른쪽 영상을 따로 받아들이면서 입체영상을 보여준다. LG가 채용한 필름패턴편광(FPR) 방식은 영상이 TV 패널에 부착된 편광판(필름)을 통과하면서 좌우 영상이 분리돼 입체감을 낸다.

◆시장을 잡으려면 세(勢)를 불려라

삼성전자는 지난달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 · 중 · 일 주요 TV 업체들과 중국 유통회사,디스플레이 조사기관 등을 초청해 '초고화질(풀HD) 3D 파트너스데이' 행사를 열었다. 행사엔 중국 TV 업체인 TCL 창훙 하이센스 하이얼 콩카는 물론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미쓰비시 샤프 등이 모두 참석했다.

목적은 최대한 많은 업체로 하여금 SG 방식을 택하도록 해 우군으로 삼기 위해서다. 시장을 주도하려면 소비자 접점을 최대한 넓혀야 하고 이를 위해선 우군을 많이 모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장원기 삼성전자 LCD사업부 사장은 당시 "이 자리에 모인 전 세계 주요 TV 업체들과 패널업체,유통업체를 통해 액티브 3D TV가 중국에서 대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의 대응도 만만찮다. 독자 개발한 FPR 방식의 3D TV를 앞세운 LG는 미국과 유럽에 앞서 중국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지난 2월 설 연휴에 이어 이달 초에도 선전과 베이징 등의 유통매장을 둘러보며 FPR 3D TV 판매 현황을 직접 점검했다. 또 노동절 특수를 잡기 위해 FPR 3D TV에 집중하고 있는 현지 TV업체 카이워스와 손잡고 공동 프로모션을 벌였다.

전 세계 3D TV 시장은 올해 500% 가까이 성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두 회사 중 누가 주도권을 잡을지는 아직은 안갯속이다. 프리미엄 시장에선 SG 방식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범용 제품에선 FPR의 추격이 만만찮다.

◆시장 승패는 기술 우위와 무관하다

시장 표준은 대체로 기술 우위 여부가 아니라 마케팅과 전략에 따라 정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소니와 JVC가 벌인 VTR 기술 표준경쟁이다.

베타 방식으로 불린 소니 기술과 VHS 방식으로 불린 JVC 기술은 호환성이 없어 누가 VTR 시장의 표준이 될 것인지를 놓고 한판 승부가 불가피했고, JVC가 싸움에서 최후 승리자가 됐다. 소니의 베타 방식이 화질 구현 등 기술적으로 더 우월했지만 시장은 JVC 방식을 택했다.

JVC가 싸움에서 승리한 직접적인 배경은 기술 개방에 있다. 소니와 달리 자신의 기술을 전 세계 여러 회사에 오픈하면서 이 기술을 채택한 제품이 늘었고 소비자 선택은 VHS 제품으로 몰렸다. 결국 JVC 기술은 사실상의 시장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PC 시장에도 전례가 있다. 애플은 PC 시장에서 쓴 맛을 본 경험이 있다. 1980년대 PC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애플과 IBM의 운명은 시장표준화 경쟁의 승패로 엇갈렸다. 애플은 자사 기술을 공개하지 않은 반면 IBM은 자사의 컴퓨터 기반구조에 대한 기술을 공개했고 호환PC들이 시장을 압도했다. CISC라는 표준을 선도해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장악한 인텔,DOS와 윈도라는 PC 운영체제(OS)의 사실상의 표준을 장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있다.

강병구 고려대 교수(경영학과)는 '표준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책에서 시장을 지배하려면 표준화가 필요하다며 5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는 표준 선점은 단일 기업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만큼 제휴와 연합이 필요하고,둘째는 표준 영역은 확대하되 핵심가치 기술은 숨겨두라는 것이다. 움직이는 과녁이 돼야 한다는 게 세 번째다. 지속적인 기술 업그레이드로 기존 제품을 구닥다리로 만들어 경쟁사의 과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네 번째는 인터페이스 표준을 활용해 독자기술을 살릴 것,다섯 번째는 부품 플랫폼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