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어느 날,서울대 제어계측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한 대학원생은 서울 신림동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장래를 고민하면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공대 출신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선택이 많이 않던 시절.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창업이나 해볼까'란 것.사업계획도 없이 장난처럼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휴맥스의 전신인 ㈜건인시스템,창업을 주도한 대학원생은 바로 변대규 휴맥스 대표(51)였다.

'벤처 1세대 기업' 휴맥스가 창업 21년 만에 연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제조분야 벤처기업으로 매출 1조원 고지를 밟은 곳은 휴맥스가 처음이다.

변 대표는 2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년 말 기준으로 휴맥스가 매출 1조52억원,영업이익 750억원을 올렸다"고 밝혔다. 그는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 등과 함께 벤처 1세대를 대표하는 기업인이다. 수많은 벤처들이 창업 후 몇 년 만에 무너져내린 것과 달리 그는 휴맥스를 세운 이후 21년간 기업 인수 · 합병(M&A) 없이 디지털 셋톱박스란 단일 품목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휴맥스의 경영지표는 이를 잘 말해 준다. 창업 첫 해 1억2500만원이던 이 회사 매출은 올해 1조원을 넘어서며 8000배 늘었다. 벤처기업 중 매출 1조원을 넘긴 곳은 2008년 NHN(1조2901억원)에 이어 두 번째다. 정보기술(IT)서비스가 아닌 제조업 분야 벤처로는 최초 기록이다.

현재 휴맥스는 셋톱박스 분야에서 세계 4위에 올라 있다. 15개 해외법인 · 지사를 설립하고 폴란드 등 7개국에 생산거점을 두고 있으며 전 세계 80개국에 셋톱박스를 수출한다. 유럽 최대 방송시장인 독일과 영국,중동지역에선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 그는 "작년 매출의 98%를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였다"며 "지난 20~30년간 독자창업해 대기업 계열사를 빼고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해 매출 1조원을 올린 곳은 휴맥스뿐"이라고 강조했다.

변 대표는 이날 간담회에서 휴맥스의 성장 로드맵을 제시했다. 주력사업인 셋톱박스 분야는 신시장 개척에 주력하겠다는 전략을 내놨다. 미국 위성방송 시장에 이어 올해 케이블 방송에 진출하고 동유럽 등 신흥시장 공략에도 나서기로 했다.

신사업으로 자동차와 IT를 결합하는 '차량용 인포테인먼트(CI)'에 진출하겠다는 비전도 내놨다. 올해 차량용 셋톱박스,TV를 공급하는 사업을 상반기 중 시작할 계획이다. 첫 타깃은 올해 7월 아날로그 방송을 디지털방송으로 전환하는 일본 시장으로 정했다. 변 대표는 "도요타자동차 자회사인 '덴소'를 통해 일본에서 차량용 셋톱박스를 공급하기로 계약했다"며 "일본 시장에서 올해 300억원,내년 600억~7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동차 제조사에 직접 제품을 공급하는 방안도 추진키로 했다. 휴맥스는 작년 GM,르노닛산,폭스바겐에 차량용 오디오를 납품하는 대우아이에스 지분 16.17%를 확보했다.

변 대표는 향후 휴맥스의 청사진과 관련,"2015년 매출 2조3000억원을 올리는 글로벌 기업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