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삼성전자 멕시코 공장(SAMEX)은 골칫거리였다. 전략지역인 미국에서 판매되는 TV의 생산기지였지만 품질이 좋지 않았다. 시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맞춰 제때 물량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 판매가 부진하면 영업담당자들은 "멕시코 공장 때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누구도 판매부진의 핑계로 멕시코 공장을 들먹이지 않는다. 완벽한 품질과 적시 공급으로 오히려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변화는 시체부검을 뜻하는 '포스트 모템(post mortem)'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시작됐다.


◆미국시장 승부는 멕시코에서

전자업계에는 두 가지 속설이 있다. 하나는 'TV시장을 장악하는 자가 세계 전자시장을 장악한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미국시장에서 1위를 해야 글로벌 시장 1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삼성전자는 일대 전기를 맞았다. TV시장 1위,미국시장 1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고민에 빠졌다. 수십년간 일본이 지배해온 전자시장의 주도권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데 멕시코 공장이 큰 걸림돌이 됐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결단을 내렸다. "멕시코 공장으로 모두 모이라"는 오더를 내렸다. 참석 대상자는 광범위했다. TV담당 사장은 물론 북미지역 판매 담당자,한국의 상품기획 담당자,연구소 연구개발 담당자,멕시코 법인 생산 담당자 등 임원만도 수십명에 이르렀다.

멕시코 공장에 모인 이들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상품 아이디어부터 시작해 사소한 회로와 물류,생산라인의 문제점까지 수백개의 문제가 다뤄졌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부검을 뜻하는 '포스트 모템'이었다. 김석기 멕시코법인장은 "어감이 좋지 않아 안 쓰려고 했지만 이 말보다 당시 회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를 찾지 못해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석상에서 미국 내 판매 담당자들은 현지인이 원하는 제품의 세부 속성을 세세히 전했다. 상품 기획자들은 이를 어떻게 반영할지 해법 마련에 착수했다. 멕시코법인은 새로운 스펙의 제품 생산을 위한 라인 조정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성과는 좋았다. 김 법인장은 "이 회의가 끝나고 얼마 후 연구개발 파트에서 설계도면이 날아왔는데 멕시코 공장에 딱 맞게 설계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포스트모템 프로그램의 성과였다. 2006년 삼성전자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 TV시장 1위(판매수량 기준)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건희의 복합화 철학을 실천하다

2007년 이렇게 생산한 보르도TV는 북미시장에서 꽃을 피웠다. 삼성전자가 판매대수는 물론 판매금액 기준으로도 경쟁업체를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이다. 세계 전자업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 순간이었다. 이를 가능케 한 숨은 공신이 포스트모템 프로그램이었고,그 이면에는 이건희 회장의 복합화 철학이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하면서 "21세기 경쟁력의 핵심은 복합화에 있다"며 "미래에는 자주 모이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된다"고 말했다. 그 예로 TV를 들면서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디자인,섀시 설계,회로 설계,판매,상품기획 담당자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짜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말,얼굴표정,손짓,눈빛을 통해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좋은 제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포스트모템이 딱 그런 모델이었다.

이와 함께 멕시코 공장은 셀(cell) 방식을 도입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컨베이어벨트에 늘어서서 한 사람이 한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2인1조가 돼 최종 조립과 검사까지 한꺼번에 하는 것이다. 공장은 작업자들이 허리를 숙이지 않고 작업할 수 있게 재편했다. 그 결과,인원은 4700명에서 3100명으로 줄었지만 생산규모는 오히려 증가했다.

이런 생산성 향상은 물류시스템 선진화로 이어졌다. 지금 멕시코 공장은 미국 최대 가전 판매회사인 베스트바이가 1주일 전에만 주문을 내면 정확히 창고까지 배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재고가 사라진 것이다. 멕시코 공장을 빠져나와 미국 국경을 넘는 컨테이너 박스는 하루 180~200대에 달한다.

이직률을 낮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요인이다. 멕시코법인의 연간 퇴직률은 2007년 7%에 이르렀지만,작년에는 1.2%까지 낮춰졌다. 현장을 안정시킨 이람 피넨 제조팀장(상무)은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2009년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