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무리하게 연임한 것이 잘못인 것 같다. "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지난달 27일 열린 계열사 사장(CEO)단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퇴의사를 밝히면서다.

라 회장은 신한금융의 상징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라 회장 없는 신한금융을 생각할 수 없다"는 직원이 상당할 정도였다. 그런 라 회장이 지난달 30일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냥 물러난 게 아니다. 주인 없는 은행의 바람직한 지배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과제도 함께 남겼다.

◆'탁월한 경영인' vs '황제 대리인'

라 회장은 1977년 초 이희건 현 신한금융 명예회장을 처음 만났다. 이 명예회장의 제일투자금융 설립 작업에 참여하면서다. 라 회장은 재일교포들이 신한은행을 만든 1982년 신한은행 상무로 옮겼다. 1991년 은행장에 오른 뒤 1999년 초까지 은행장을 지냈다. 잠시 신한은행 부회장으로 물러나 있다가 신한금융이 만들어진 2001년 회장에 올랐다. 19년 동안 CEO로 재직한 셈이다.

그가 이룬 업적도 괄목상대했다. 조흥은행과 LG카드를 차례로 인수하면서 신한금융을 국내 3위로 키워냈다. 관치와 외압이 통하지 않는 전통도 만들었다. 대주주(재일교포)의 위임을 받은 경영진,이를 견제하는 사외이사,잡음이 일지 않는 후계구도 등 주인 없는 한국 은행산업의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신한금융 내분사태는 그가 구축한 지배구조가 허상이었음을 드러냈다. 17%의 지분을 가진 재일교포 주주 상당수는 권한위임을 철회했다. 위기상황에서 사외이사는 제 역할을 못했다. 탄탄한 후계구도는 진흙탕 싸움에 다름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한 전직 시중은행장은 "라 회장이 금융산업에 기여한 공로는 엄청나지만 그도 결국 CEO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라 회장이 끝까지 등기이사직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신한금융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것 같다"면서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CEO리스크는 모든 은행의 과제

CEO리스크는 주인 없는 국내 은행들의 구조적인 문제다. 국민은행도 그랬다. 국민은행은 한때 가장 선진적인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은행장은 연임을 위해,사외이사들은 기득권을 위해 한통속이었음이 드러났다.

우리금융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우리은행장이 바뀌었다. 한 임원은 "어떤 은행장은 자산을 늘리라고 하고,어떤 은행장은 리스크 관리에 집중하라고 하다보니 직원은 물론 투자자들도 헷갈려했다"며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의 숙명과도 같은 CEO리스크"라고 진단했다.

하나금융지주는 신한금융과 지배구조가 비슷하다.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은 1997년부터 하나은행장과 하나금융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주주들도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포스트 김승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모범적인 지배구조라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당국도 관치 유혹 떨쳐내야"

금융위원회는 내년 초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을 제정키로 했다. 금융연구원은 이를 위한 연구 결과를 6월 발표했다.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해 사외이사제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CEO리스크를 회피할 구체적 장치는 없다. CEO가 얼마든지 사외이사나 감사위원회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음이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CEO리스크를 해소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규제를 취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CEO의 연임을 제한하는 방안,씨티그룹처럼 CEO 나이에 제한을 두는 방안,소액주주들이 사외이사 선출에 참여하는 방안 등 대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강병호 한양대 교수는 "미국에서는 금융회사 CEO의 임기를 직접 제한하지 않는다"면서 "CEO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선 사외이사와 감독당국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물론 은행소유지분제한 문제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과 정부가 CEO선임에 관여하려는 유혹도 떨쳐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