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공리주의 비판많지만 '선택'에 직면하면 결국 공리적 판단에 의존

첫 구조자 아발로스는 답답한 지하에서 가장 먼저 탈출해 얼른 생각하기에 가장 행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아발로스는 나머지 32명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도록 위험부담을 안고 위험을 감수했다.



맨 먼저 구조장비인 '불사조' 캡슐에 타는 사람은 그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데 동원된 일종의 피실험자가 되었다.



가장 건강한 사람이 가장 큰 부담을 짊어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는 윤리학 원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알려진 공리주의적 관점이다.



공리주의는 어떤 행위가 가장 큰 유용성(효용)을 창출할 때 그 행위를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발생할 수 있는 전체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신종플루 예방백신 접종 순서도 공리주의 따라

지난해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했던 신종플루 사태에서도 공리주의에 따른 선택이 이뤄졌다.



당시 수능 응시생 중 3000여명이 분리된 공간에서 시험을 치르고,일부 학생들은 아예 병상에 누워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타미플루가 부족하다는 우려로 긴장감이 감돌았고 급기야 정부는 예방백신 항바이러스제 접종을 정부 예산으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충분치 못한 백신 생산량과 물량 때문에 접종 대상은 전 국민의 35% 수준인 1716만명에 그쳤다.



여기서 '무슨 기준으로 우선 접종대상자를 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칠레 사고에서 구조 순서를 정하는 기준을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부는 논의 끝에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 및 사망위험이 높은 1716만명을 우선 접종대상자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①의료 · 방역요원 ②학생 ③영유아 · 임신부 ④군인 · 노인 · 만성질환자 순서로 접종을 실시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에 대한 접종이 끝난 뒤 자신의 돈을 내고 접종을 받도록 했다.

이러한 순서는 타당한 것인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우선 접종대상은 아니었을까.



왜 의료 및 방역요원이 가장 우선이며,노인이나 만성질환자보다 영유아나 임신부가 우선이었나.

의료 · 방역요원이 1순위 접종대상자가 된 이유는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들이 신종플루에 걸린다면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만큼 이들부터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학



생과 영유아가 노인보다 앞서는 이유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방백신 접종 순서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더 많은 유용성을 창출할 수 있는 기준을 따져 결정된 것이다.

⊙공리주의는 공공정책 수립에 큰 영향력 발휘

여기서 공리주의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공리주의 창시자는 벤덤이다.



벤덤은 그의 대표작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서 "자연은 인간을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명의 상전의 지배하에 두었다.



단지 이 둘에 의해서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라고 공리주의의 전제를 규정했다.



'더 많은 쾌락과 더 적은 고통'이라는 공리주의의 기준은 현실 공공정책 수립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입법자들이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최



대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또한 최소한의 고통이 따르는 방향으로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리주의는 '공공선''공익'이라는 매력적이고 호소력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탓에 이를 거스르는 의견을 주장하긴 쉽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칠레 광부 구조 순서도 기본적으로 공리주의 관점에서 결정됐다.



광부 33명에게 발생할 '좋음(쾌락)'의 총합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는가가 판단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존 롤즈,공리주의는 개인의 입장을 무시할 수 있다고 지적

공리주의에도 약점은 있다. 전체의 이익을 따지다보면 소수자나 개인의 입장을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공리주의 약점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존 롤즈다.



롤즈는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일생을 연구했다.



1971년 초판이 발행된 롤즈의 역작 '정의론'은 명실상부한 현대의 고전으로 통한다.



롤즈의 정의에 관한 탐구는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입시는 물론 각종 시험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롤즈는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조건에서도 개인이 지닌 운과 부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모든 사람은 사회 복지(공동의 이익)라는 명분으로 유린당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미국 정부의 주요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최근 인기리에 읽히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들도 공리주의에 반대한다.

⊙실천 윤리학,공리주의에 더해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

롤즈의 정의론이 이전 공리주의에 비해 혁명적이긴 하지만,여전히 이론적인 반성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대표적 인물이다.



싱어는 공리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인간의 행동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며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을 요구했다.

싱어는 1970년대 중반부터 '동물해방'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그는 "인간의 행복만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불과하다"며 "이런 관점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인간과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고,불필요한 동물 실험을 모두 없애고,육식도 거부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벤덤 역시 싱어에 앞서 비슷한 입장을 제시했다. 벤덤은 공리주의자라면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동물의 고통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고려해야 할 것은,그 판단이 영향을 미칠 대상의 이성능력이나 대화능력이 아니라 그 대상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박성진 S · 논술 선임연구원 mo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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