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무너지면 치르지 않아도 될 비용 치러야



[Cover Story] 신뢰는 '사회적자본'이며 경제성장의 원동력

'우리는 왜 타인을 신뢰(trust)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대답은 '타인을 신뢰하면 상호호혜(mutual benefit)와 협력(cooperation)이 촉진돼 공동체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신뢰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사회적 복지,건전한 공동체를 위한 필수 자원이란 얘기다.

특히 '역사의 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 문제에 천착한 대표적 인물이다.



후쿠야마는 1992년 역사의 종언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정리한 세계적 학자다. 그는 1995년엔 '신뢰'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자신의 지적 관심의 초점을 이동했다.



서구사회 번영의 핵심 화두로 신뢰를 제시한 것이다.

'사회적 자본'으로 유명한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남도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석학이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을 신뢰,규범 그리고 네트워크로 이해하며 그 중에서 신뢰를 사회적 자본의 중심적 요소라고 역설했다.

후쿠야마와 퍼트남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해온 신뢰는 우리나라가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신뢰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신뢰는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

후쿠야마가 신뢰라는 화두를 제시한 이후 신뢰가 경제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수많은 연구가 이어졌다.



거래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계약을 맺고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믿지 못해 들여야 하는 거래비용이 줄어 수익성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이것이 경제 성장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 41개국 대상의 한 연구에선 신뢰 수준이 15% 높아지면 경제 성장이 1% 증가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많은 학자들은 신뢰가 거래비용을 감소시키는 것을 경제학의 게임이론으로 설명한다.



갑과 을 두사람이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두사람은 상대방을 신뢰하거나,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해야 한다.



두사람의 선택에 따라 이익 분배는 다음 표와 같이 네 가지 중 하나가 된다.

이 게임에는 유일한 균형점이 존재한다. 갑의 입장에서 을이 신뢰할 것으로 생각되면 기회주의적 행동을 선택해야 더 큰 이익(1만5000원)을 얻을 수 있고,을이 기회주의적 행동을 한다면 자신도 기회주의적 행동을 해야 더 많은 이익(5000원)을 보장받는다.



이는 을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서로를 신뢰하지 않은 두사람은 각각 5000원을 받는데 만족하게 된다. 만약 두사람이 서로를 신뢰한다면 각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두 배인 1만원으로 불어난다.



현실에선 이런 경우 각 게임자가 상대방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막기 위해 감시하느라 거래비용이 발생한다.



그 거래비용은 상호 신뢰의 이익의 합인 2만원과 기회주의적 행동의 이익의 합인 1만원 간의 차이가 된다.



신뢰는 이런 비용을 줄여준다.

⊙ 신뢰는 위험부담이 따라도 서로를 믿는 것

신뢰의 사전적 정의는 '굳게 믿고 의지함'이다. 사회학 등의 학문에선 어떻게 정의할까.



신뢰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 틀을 만든 독일의 사회이론가 루만은 '어떤 좋지 못한 결과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쿠야마는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편적인 규범에 기초해 규칙적이고 정직하게 그리고 협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런 설명을 종합해 보면,신뢰란 '사회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에서 비록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부담이 따르지만,서로가 보편적 규범을 좇아 규칙적이고 정직하게 협동적 행동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회관계에서 신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 것 외에도 신뢰가 여러 가지 유용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신뢰는 관용을 베풀게 하고,낯선 사람에 대한 불필요한 경계심을 줄여주며,정치적 · 문화적 차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또 공동체에서의 협동은 물론 타인을 위한 희생까지 할 수 있는 강력한 집단 결속력을 만들어낸다.



갈등과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비용도 줄여준다.



이런 신뢰의 기능은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다.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신뢰 회복의 기반

사회학자들은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에 대해 공적 측면에서의 신뢰는 미흡하지만,사적 측면에선 오히려 과잉 상태라고 분석한다.



학연 지연 혈연 등 파당적 연줄 망을 통한 사적 신뢰가 강해 그 연줄 망 바깥의 타인에 대해서는 폐쇄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사적 신뢰의 기형적 과잉 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공식적 제도 대신 비공식적 연줄 망에 의존하게 만든다.



원칙이 무너지고 신뢰가 상실된 상황인 것이다.

신뢰를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정하고 투명한 '게임의 규칙'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먼저 공적부문이 공정한 심판자로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일관된 규칙에 의한 법치주의가 작동할 때 사람들은 연고주의(緣故主義)에 매달리지 않고,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연결 망을 확대시킬 것이다.

이와 함께 사적부문에선 연고주의 같은 파당적 연줄 망의 표본인 동창회나 향우회를 건강한 열린 공동체로 변화시켜야 한다.



미국의 동창회 모임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나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봉사에 치중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동창회와 향우회가 회원들의 이익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도 고려하는 단체로 바뀌어야 한다.

또 신뢰 형성에 도움이 되는 공동의 가치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가족 학교 언론 등 다양한 사회화 기관들이 신뢰를 체계적으로 학습시키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장경영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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