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 회복이 예상보다 지지부진하다. 고용시장이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 통화당국은 국채 매입을 통해 추가로 대규모 자금을 풀 태세다. 양적 통화 완화 조치 기대감으로 주식시장은 상승했지만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도 적지 않다. 특히 추가 양적완화 조치로 미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환율전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자국 수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각국의 통화가치 하락 유도는 세계 경제를 보호무역주의 늪으로 빠트릴 수 있다. 보호무역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치명적일 뿐 아니라 자칫 세계 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을 수 있다. 정책 당국자뿐 아니라 경제학자들의 고뇌가 클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신문은 창간 46주년을 맞아 날카로운 시각으로 미국 경제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온 경제학 석학인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를 만나 미국과 세계 경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4일(현지시간) 프린스턴대 피셔홀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자유무역이 미국 경제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이를 선거전략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감소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요. 사실은 예전에도 자유무역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어려워지면서 거부감이 더 커진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자리 감소를 외국과의 경쟁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심화된 것이죠.지난 2년 사이 역외 고용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갑자기 커졌다고는 볼 수 없잖습니까. 그런데도 자유무역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것은 고용시장이 급속도로 악화된 때문이지요. 금융위기 전 5%대의 실업률이 9.6%로 높아진 것은 역외 일자리와 무관한데도 사람들은 이를 탓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한국인들은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언제쯤 미 의회에서 인준이 이뤄질지 관심이 많습니다.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한국과는 무관하게 미국의 경제와 정치 구도 때문인데요. 한국을 포함한 다른 어떤 국가와의 FTA도 당장 의회에서 인준을 얻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

▼FTA가 정치 이슈로 흘러버렸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FTA 인준을 얻기 위해선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공화당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공화당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치 시스템은 중간선거가 끝나면 바로 대통령 선거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정치의 계절에 공화당 의원들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는 FTA에 손을 들어줄 리 없지요. (대통령 선거 직후 등) 정치 계절을 비켜서 인준을 추진해야지요. (협상 내용을 조정하는 등의) 한국 측 노력이 있어도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한국인들이나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정치 캘린더를 바꿀 순 없으니까요. "

▼경제가 어려워진 탓인지 미국인들이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은데요.

"다소 역설적인 문제(paradox)인데요. 이념적으로는 여전히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정부 개입과 규제에 대한 반감이 이를 반영합니다. 사안별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금융 규제를 놓고도 우파들은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이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반면 좌파들은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환율 일자리 등) 국제 문제를 제외하면 미국인들은 여전히 시장경제를 믿고 있습니다. 다만 보호무역주의자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장 경제의 가치를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컬럼비아대 교수는 미 하원이 중국에 환율정책 압력을 넣기 위해 통과시킨 (공정 무역을 위한 환율개혁)법안이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요.

"상원에서 제동이 걸릴 것입니다. 보호무역주의자에게 자유무역을 하도록 위협할 때 상대가 이를 받아들이면 모든 사람이 더 잘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보복식의 무역 전쟁이 뒤따르게 됩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도 그래서 걱정되는 것이지요. 그럴 리는 없지만 상원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고 대통령 서명으로 발효되면 중국은 곧바로 보복조치를 취할 게 확실합니다. 미국도 그냥 참을 수 없고요. 세계 경제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

▼중국의 위안화 환율을 두고 미 · 중 간 갈등을 빚는 이유는 그동안 누적된 무역 불균형 탓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무역 적자와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방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마술지팡이가 있다면 당장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는 법을 만들겠습니다. 지금부터 5년 혹은 10년 아니면 20년간 실제로 어떻게 적자를 줄일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지요. 당장은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한 재정 확대책도 포함돼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인들은 마술지팡이가 없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현재의 정치구도는 당파성이 지나칩니다.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 있겠다 싶으면 공화당은 무조건 반대하고 있지요.

(이번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면 재정적자 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룰 게 확실합니다.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 때까지 (뚜렷한 해법 없이) 재정적자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쓸 것입니다. 어려운 과제일수록 장기적 안목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더 걷고 덜 쓰는' 재정 계획을 세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은 인기가 없기 때문에 재정 문제를 풀기 어렵지요. 현재의 당파성을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쉬운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일각에서는 미국 경제와 다른 경제권의 동조화 현상이 약화돼 이머징 국가의 경제가 회복돼도 여전히 미국경제의 회복 강도가 미약하다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디커플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경제 성장)속도가 느린 것이지요. 일본과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과 한국은 아주 괜찮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경제는 여전히 취약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최근 분기 중 미국에서 탄력적인 회복을 보이는 분야는 수출 쪽입니다. 수출이 미국 경제를 곤경에서 구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수입이 수출보다 더 빠르게 늘고 있는 점이 문제입니다. "

▼논란 끝에 금융개혁법이 마련됐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또 다른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급속한 전염을 막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겠죠.또 다른 거품과 금융위기를 막을 수 없다고 해서 금융 개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위기를 예방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파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위기가 터져도 전염을 막을 수 있다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금융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차입(leverage)을 통해 영업을 하면 언제든지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융사들의 차입을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해야 합니다. 금융개혁법이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그 법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할지는 다음 지진(금융위기)이 발생해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진은 계속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내진 설계가 잘 된 강한 건물을 세워 지진에 넘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

▼말씀을 듣다 보니 미국에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경제학자의 역할은 뭐라고 보십니까. 경제학자들의 위기 예측 기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데요.

"왜 자유무역(open trade)이 유용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자유무역이론이 '쇠귀에 경읽기'처럼 돼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공개적으로 여러 번 강조했지만 경제학의 가장 큰 실패는 데이비드 리카도(국제 무역 이론 체계를 완성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가 200년 전에 내놓은 (자유무역)이론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를 높이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다른 해석과 변형이 있었지만 리카도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어요.

자유무역이 위험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입니다. 지난 200년 동안 경제 교육의 실패이지요.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한국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면(자유무역을 더 많이 지지한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

▼다음 달 서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됩니다. 환율전쟁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이번 다자간 회의에서 어떤 성과를 거둬야 할까요.

"금융 규제와 관련한 몇 가지 합의가 나올 겁니다. 은행 자본 건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바젤위원회가 마련한 '바젤Ⅲ'가 승인될 예정이지요. 한국 정부가 의장국으로서 대형 금융사가 위험에 빠졌을 때 이를 어떻게 청산할지에 대한 논의를 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할 때 그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엄청났지요. 파산은 막았지만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미국이 도입한 도드-프랭크 법(금융개혁법)에는 이런 해결책들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전 세계가 이런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면 국제 금융시장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줄게 될 것입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을 때 60개국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리먼 파산으로 우리는 각국의 파산 절차가 얼마나 다른지 확인할 수 있었지요. 주요 금융국가에서 이를 통일하면 전 세계 금융시장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 체계가 다르고 정치적 입장 차이가 있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G20 서울회의에서 (금융안전망 확충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합의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프린스턴(뉴저지)=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