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유통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최근에는 한 상인이 자신의 차에 불을 지르는 극렬 시위 양상까지 나타났다. 급기야 정부 고위 당국자는 "전통시장 주변에는 SSM 허가제가 필요하다"고 공언했다. 친서민,친중소기업 바람을 타고 SSM 규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강자를 누르고,약자를 돕자는 것은 만인 공통의 심리다. 그렇지만 실제 법안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은 SSM 갈등의 본질을 좀 더 냉철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칫 약자를 구하는 데는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서 사회적 낭비만 초래한 전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곗바늘을 9년 전으로 되돌려보자.2001년 6월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셔틀버스 운행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셔틀버스가 동네 손님들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영세상인들이 다 죽는다는 외침 때문이었다.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된 뒤 '3증1감' 현상이 생겼다. 대형 소매점에선 자가용,객단가,매출 등 세 가지가 늘어난 반면 버스 운영비가 절감됐다는 뜻이다. 공짜 버스를 못 타게 된 소비자들은 자가용을 끌고 가 일주일치를 왕창 사버렸다. 동네 슈퍼 매출이 더 떨어진 건 불문가지.의원들이 앞장서 유통 대기업들을 도와주는 희극을 연출했다. 이 희극의 시나리오를 쓴 당사자는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은 유통 대기업과 영세상인 지원을 단골 메뉴로 삼은 운동가들이었다.

작년부터 SSM으로 인한 갈등이 불거지면서 기자는 습관적으로 동네 상권의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1년 전 아파트 단지 후문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유통 대기업 계열의 L슈퍼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우선 후문 바로 앞에 있는 구멍가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구멍가게의 주력 상품인 담배,음료수,아이스크림,과자를 사기 위해 도로를 2개나 건너 왕복 200m를 더 걸으려는 소비자는 없었다. 10평짜리 과일가게나 야채가게는 전보다 더 싱싱한 상품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다만 상가건물 지하 1층에 있는 D마트(중대형 슈퍼)는 다소 타격을 입었다. 종업원이 더 많은 L슈퍼에 밤 10시 이후나 3만원 이하 배달 손님을 빼앗겼기 때문.장기간 지역상권을 장악해온 D슈퍼가 오랜만에 강적을 만난 셈이다. 100평 남짓한 매장규모,신선식품과 가공식품을 투톱으로 내세운 진열방식까지 닮은 꼴이다. 그러나 상품구색과 품질,가격은 D마트가 한 수 위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고객성향을 꿰뚫고 있어서다.

위 사례처럼 SSM은 동네 구멍가게(영세상인)의 천적이 아니다. SSM의 경쟁자는 중대형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토착 소매자본가'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100평 이상 슈퍼마켓을 차리려면 권리금과 임차보증금,초도상품비 등 투자금이 최소한 10억원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동네 구멍가게를 위협하는 유통 업태는 기실 SSM이 아니라 기업형 편의점이다. 그런데 이 편의점도 대기업 자체가 아니라 대기업 브랜드를 쓰는 자영업자(중소 상인)일 뿐이다.

논어의 자로(子路)편에는 정명(正名)이란 말이 나온다. 모든 사상은 개념을 바로 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공자의 충고다. 유통 업태에 대한 몰이해는 때로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집단상가와 복합쇼핑몰을 혼동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서울 장지동의 '가든 파이브'는 정명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생생한 사례다. SSM도,가든 파이브도,셔틀버스도 본질에선 결코 다르지 않다.

강창동 경제학博 유통전문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