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통장,신용카드,보험증서 한 장 없이 현대사회를 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국민 대다수가 금융사업의 전 영역에 걸쳐 거래 당사자이며 소비자이기도 하다. 이 같은 추세를 보여주듯 금융 관련 불만도 갈수록 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금융거래를 하면서 피해를 호소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소비자들의 불만을 여과 없이 담아내는 각종 언론매체의 기사나 프로그램도 부쩍 증가했다. 필자 역시 직 · 간접적으로 금융사의 잘못을 자주 보고 듣는다. 소비자보호의 1차적 책임은 금융상품을 설계 · 판매한 당사자에게 있다. 절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고,풍부한 시장경험과 우월한 교섭력을 지닌 만큼 이는 당연한 판단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에 접수되는 민원 건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금감원이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할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불만도 상존한다. 소비자들은 금감원이 금융사 편을 든다고 불평하는데 비해 금융사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성토한다.

그러나 금융분쟁조정위원으로서 민감한 다툼에 관여하고 있는 필자가 느끼기에 금감원은 중립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소비자 주권의 실현에 소극적이라는 일각의 비판은 맞지 않다. 오히려 금감원은 금융소비자 보호에 매우 적극적이다. 지난 해 금감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에서 민원인의 주장을 받아들인 인용률은 63.2%다. 이는 소송에 비춰봐도 매우 높은 비율이다. 또한 조정위원회의 결정을 금융사가 받아들이지 않은 비율도 낮아졌다. 조정이 판결이나 중재판정에 못지않은 '대체적 분쟁해결' 방법으로 실질적 기속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정결정은 금융사들이 비슷한 분쟁사례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선례로 자리 잡아가고 금융사들의 정책에 반영돼 소비자 이익으로 직결되고 있다. 최근 암과 유사한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에 걸린 14세 소년에 대해 암 관련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결정한 것은 다양한 유형의 소비자보호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또 펀드가입 경험이 전무한 소비자에게 원금이 보장되는 것으로 안내한 은행이 손해액의 절반을 물어내도록 결정한 것도 소비자의 환영을 받았다.

조정신청은 인터넷으로 언제나 접수되고 비용 한 푼 들지 않지만 고도의 전문가들이 학식과 경험을 살려 진지한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준다. 소비자단체에서 줄곧 요구해 왔던 대로 조정위원회 구성도 소비자단체와 금융업계 위원을 같은 수로 맞춰 소비자의 위상을 제도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다. 정보와 경험을 비롯해 계약의 교섭력에 있어 열등한 소비자들을 위해 그 보호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시장의 잘못된 거래관행을 바로잡는 것도 시급하다. 소비자보호는 장기적으로 금융사의 진정한 경쟁력이다. 다만 소비자보호라는 명분 아래 금융시장의 특성과 금융상품의 기본원리마저 깨서는 안 될 것이다.

금감원은 소비자서비스본부 발족,금융교육자문위 구성,금융사별 민원처리실적 공개 등 지금까지의 노력에 더해 조정신청에 소멸시효 중단의 효력을 부여하고 조정결정에 편면적(片面的) 구속력을 인정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일이다.

근본적으로는 금융소비자들이 금융상품과 산업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높이도록 교육하고,금융사들이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어 바르게 파는 문제도 지금까지 해온 것 이상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금융사의 시장진입,상품설계와 판매,지급과 분쟁해결의 전 과정에 걸쳐 소비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2010년을 소비자보호 원년으로 정한 금감원이 그에 걸맞은 감독 역량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할 때다.

김선정 동국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