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노동조합 집행부는 저녁회식을 하면 차수 변경없이 1차에서 끝낸다. 한 해를 마감하고 정리하는 연말 망년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접대부가 나오는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은 절대 가지 않는다. 할 얘기가 남아 있거나 술이 부족한 간부들은 개별적으로 인근 포장마차를 들르는 경우는 가끔 있다. 술 종류도 값이 비싼 양주는 마시지 않고 소주나 막걸리로 때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이다. 이러한 검소하고 소박한 서민적 모습은 조합원들의 신뢰로 이어지고 상생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 회사 박준수 노조위원장은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조합원들도 지도부를 믿고 따라온다"며 간촐한 회식 배경을 설명했다.

LG전자노조의 회식문화는 요즘 한국노총 본부까지 스며들고 있다. LG전자 노조위원장 출신인 장석춘 위원장이 2008년 초 조직을 이끈 이후부터 한국노총 본부의 '밤문화'가 변화한 것이다. 실제 한국노총 빌딩 인근 술집에서 한국노총 직원들을 목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녁 때 술을 자제하라"는 장 위원장의 '금주령' 때문이다. 장 위원장은 "과음을 하면 대화도 제대로 안 되고 다음 날 업무에 지장도 많아 술을 자제하도록 본부 조합원들에게 권유한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노조 간부들이 술자리를 통해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구축하기도 하고 때로는 애로사항을 들으며 인간적 관계를 맺어가는 과거 노동판의 관행과는 딴 판이다.

지난 1월 LG전자 노조의 사회적 책무(USR) 선포식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자기절제와 높은 도덕성,노사간 신뢰 등 상생의 인프라가 두텁게 깔려 있기에 가능했다. USR 내용 가운데 노조회계의 투명성은 특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노조는 단위기업노조 차원에선 처음으로 외부감사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외부 회계전문가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노조비를 투명하게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노조의 온갖 비리가 회계 불투명에서 비롯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일대 혁신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노조비만 제대로 관리해도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훨씬 나아질 것이란 분석이 많다.

LG전자 노조는 이시대 노동운동의 선구자다. 노동현장에선 툭하면 비리가 터져나온다. 일선조합원들이 피땀흘려 모은 노조비는 '눈먼돈'으로 인식돼 노조간부들이 별다른 통제없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지난해 3월 모 은행 노조지도부가 단란주점,안마시술소 등에서 조합비 4200여만원을 탕진한 사건이나 최근 H노조 간부가 취업을 미끼로 구직자로부터 3억원이 넘는 돈을 받아 가로챈 사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회사 측으로부터 룸살롱 등에서 술 접대를 받거나 물품 납품과정에서 돈을 챙기는 노조간부들도 적지 않다. 노조재정을 관리하던 모 은행노조간부는 은행매각에 반대하기 위해 거둔 파업기금을 가로채다 적발되기도 했다.

여러 계파 간 갈등을 겪고 있는 노조들은 선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파업을 밥먹듯이 벌이면서 노조비를 허공에 날려 버리고 있다. 노조위원장 선거는 정치판을 방불케 한다. 규모가 큰 사업장의 경우 수억원의 선거자금이 동원돼 선거 한번 치르면 빚더미에 앉는 후보자들이 많다. 노조전임자를 제한하는 타임오프제(근로시간면제제도) 시대를 맞아 노동운동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노조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