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후세에 남긴 과제는

마지막 새해 구상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온다…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호암의 분배론
기업 최대의 간접 분배는 투자 통해 일자리 늘리는 것
[호암 탄생 100주년…다시 길을 묻다] (下) 타계 직전까지 '反기업 정서' 그렇게 걱정했는데…

"아시아의 시대,태평양의 시대가 온다. 한국이 시대의 주역이자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

1987년 1월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한 언론사 기고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조국의 미래를 이렇게 얘기했다. 호암의 국가개조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는 이 글의 제목은 '부국론(富國論)'이었고 '환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되자'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10개월여가 지나 유명을 달리하게 될 기업인의 새해 구상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하고 원대했다. 더욱이 그 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문제로 정국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시기였다.
◆"아시아 시대가 온다"

호암이 이런 시기에 경제대국론을 들고나온 것은 평생을 관통했던 사업보국론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튼튼해야 기업도 성장한다"는 삼성가(家) 특유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주창한 '강소국론'이나 '국민소득 3만달러론'도 같은 맥락"이라며 "비록 20년 이상이 흘렀지만 당시 호암이 제시한 부국책들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가 풀어가야 할 과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호암은 첫 문장에서 "결론부터 분명히 밝히면 한국은 환태평양 시대의 도래와 함께 그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유력한 위치를 굳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해 "인류문명의 성쇠는 800년을 주기로 동 · 서양을 오간다고 했으니 20세기가 서양의 마지막이다. 앞으로 28세기까지는 아시아가 지구의 주역이 된다"며 한국은 이를 새로운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호암은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경제권의 급성장과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무역 증가를 실증적 근거로 들었다. 그의 예측대로 중국은 1990년대 들어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을 가속화하면서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아시아는 세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했다.

◆"모든 기업인은 장보고의 후예"

"해상무역로를 개척해 국가 경제에 크게 공헌한 신라의 장보고 이후 나라에 기여한 경제인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이들을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 " 이 말에는 기업에 대한 이 같은 인식 부족이 부익부빈익빈 논란,분배 논란으로 이어져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호암은 부국을 이끌어갈 '기관차'는 기업이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이 또 다른 경제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호암이 걱정했던 반(反)기업정서는 아직도 여전히 한국 경제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호암이 살았던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 반기업정서를 조장하는 기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조직화됐다"며 "호암이 지금의 현실을 본다면 낙담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호암은 또 '분배론'을 통해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삼성공화국론'을 예감하기도 했다. 삼성은 2000년 이후 세계시장에서 폭발적인 성공가도를 달려왔지만 삼성의 독주에 대한 견제심리 확산으로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기업의 분배는 임금으로 지급되는 직접 분배와 납세 등의 간접 분배가 있다. 최대의 간접 분배는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간접 분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간접 분배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 비대화 논란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부단히 성장 · 발전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호암은 경제대국으로 가기 위한 구체적 방안도 내놓았다. 그는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수출의 진흥,그 완전무결한 실천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수출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부국의 기초가 되고,성장하는 기업은 국가의 자산이 된다는 논리였다. 수출 진흥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우선 경제정책면에서는 규제 철폐를 과제로 꼽았다. 그는 "역사상 통제경제 아래에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나라는 없다. 사유재산제도를 바탕으로 기업활동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창의력을 북돋워주는 자유주의 체제를 완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노사협력체제 구축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호암은 "2차대전 이전 일본의 대표적 재벌은 미쓰이였지만 전후에는 수위 자리를 미쓰비시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는 미쓰이그룹 계열사들이 장기간 노동쟁의에 사력(社力)을 소모한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기업이 운영하는 자금 자재 인재는 공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이를 낭비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무책임한 행위"라고 질타했다.

호암은 특히 요즘에야 한국 교육계가 지향하고 있는 정책 방향도 일찌감치 내놓았다. "개성 없고 획일적인 교육을 개성 능력 창의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천재나 영재 육성이 가능하다. "

그는 "지난 수백년 역사 속에서 당파 간 대립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를 잃고 시간을 낭비했으며 민족과 국가 발전의 기회를 잃었는가"라며 정치 안정을 마지막 과제로 꼽았다. "정치가 안정돼야 기업과 국민이 경제 건설에 전념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전삼현 숭실대 교수는 "호암이 제시한 처방과 과제들은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G20 정상회의 주최국 입성을 계기로 호암이 남긴 정신적 유산들을 곱씹어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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