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세기의 승부사 이병철

'事業報國'을 평생의 業으로

당장 배고프고 입을게 없는데 비행기·선박 만들어서 뭐하나
기업은 국민이 원하는것 찾아줘야
제일제당 세워 설탕 싸게 공급
제일모직 만들어 '입는 것' 해결
1930년대 대구에서 양조장 사업으로 목돈을 거머쥔 호암은 해방이 되자 서울로 향했다. 더 큰 사업거리를 찾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서울 거리는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 서울은 좌우로 나뉘어 큰 혼란을 겪고 있는,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호암은 고민에 빠졌다. "해방이 됐는데 왜 이리 어수선한 것일까. " 사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6 · 25전쟁의 경험,"국가 없이 기업 없다"

호암은 혼란의 본질을 가난에서 찾았다. 그는 "국민 생활이 빈궁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가 안정될 리 없다. 정치 안정의 기반은 경제와 민생 안정에 달렸다"고 결론 내렸다. 평생의 업(業)으로 삼은 사업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구로 돌아간 호암은 "당장 자본도,기술도,전력도 없다면 국민에게 필요한 것을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고 판단했다. 무역업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제분업과 양조장 사업도 병행했다. 그리고 1948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오징어를 해외에 수출하는 대신 국내에서 가장 부족했던 면사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수입 면사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삼성물산공사는 1년도 지나지 않아 국내 7위의 무역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2년 뒤 터진 6 · 25전쟁은 그가 일군 대부분의 사업 기반을 앗아갔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해 3개월간 운전기사였던 위대식의 다락방에 숨어지내기까지 했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경영관은 이때 확고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는 훗날 한 연설에서 "그때 자유민주주의와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인생관도 바뀌었다. 국가가 있고 나서야 사업도 있고 가정도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호암 탄생 100주년…다시 길을 묻다] (上) "국가 있어야 기업도 있다"

◆"기업은 시대정신의 대변자"

1950년대 삼성이 설탕 제분 섬유 등 이른바 삼백(三白) 산업에서 성공하자 '삼성은 소비재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은 "소비재냐 생산재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양질의 제품을 얼마나 저렴하게 사회에 공급하느냐,이것이 기업의 사명이고 기업이 존재하는 가치"라며 당당히 맞섰다. 당장 배 고프고 입을 것이 없는데 선박을 건조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커피 대중화와 함께 일반 가정의 식단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은 이런 배경에서 1953년 설립됐다. 참모들은 "설탕을 수입해 파는 것이 안전하고 이익도 더 나는데…"라며 회사 설립을 말렸지만 물러설 호암이 아니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기업 면모를 갖춘 제일제당은 가동 직후부터 설탕값을 3분의 1로 떨어뜨렸다. 동시에 수입 설탕 점유율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호암은 설탕 가격을 올리자는 회사 임원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내가 제일제당을 설립해 설탕을 생산한 것은 무역으로 번 돈을 제조업에 투자해 국민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신뢰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였다.
[호암 탄생 100주년…다시 길을 묻다] (上) "국가 있어야 기업도 있다"

◆"세상에 도움주는 사업이 번영한다"

제일제당에 이어 설립한 제일모직도 마찬가지였다. 먹는 것 다음은 입는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국제 섬유업계의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유럽에서 최고의 기계와 부품을 들여다 '골덴텍스'를 만들어냈다. 이 브랜드는 이후 수십년간 한국 섬유산업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누군가 호암에 대해 '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평을 한 적이 있다. 사업에 대한 귀신 같은 안목이 마치 번갯불과 같다는 얘기다. 이에 대한 호암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는 자서전에서 "처음부터 돈만 버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사업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사업은 자연히 번영하게 될 것이고,사업이 번영하면 돈은 저절로 벌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은 시대의 요구를 해결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시대의 절박한 경제적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기업가의 자세라는 얘기였다.

한비사건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69년,삼성전자를 전격 설립한 것은 호암의 꺾이지 않는 기업가정신을 보여준다.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를 위해서도 '축복받은 선택'이었다. 호암은 기술과 노동력 수준,내수와 수출 전망 등을 볼 때 전자산업이야말로 미래에 가장 유망한 사업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창립사를 통해 "자본금 1억원 이상 회사라면 대소를 막론하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사업보국의 기치를 다시 한번 내걸었다.

반도체사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반발에 부딪치자 "그냥 돈벌이를 하려면 반도체 말고도 많다. 왜 이렇게 고생하고 애써야만 하는가.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이기 때문"이라며 밀어붙였다. 일관된 사업보국의 꿈,그것이야말로 척박했던 시대를 헤쳐나갔던 기업가정신의 원동력인 것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