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가란졌다. /제운 맘 이 한 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희부얀 종이 등불 수집은 걸음걸이/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김영랑 시인이 '제야(除夜)'에서 노래한 것처럼 모질지 않은 세월은 없다. 시의 배경이 된 1930년대가 일제 강압과 궁핍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치열한 경쟁과 실직의 시대다. 먹고 살기는 나아졌지만 삶은 여전히 버거운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야를 기리는 것도 그 무거운 짐을 1년에 한 번씩이라도 털고 가자는 뜻일 게다.

제야는 음력으로 한 해의 끝인 섣달 그믐날 밤을 뜻한다. 제석(除夕) 또는 세제(歲除)라고도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궁중에선 역귀를 쫓는 나례(儺禮) 의식을 벌였다. 민간에선 집안 구석구석 등불을 밝히고 눈썹이 세지 않도록 밤을 새우며 수세(守歲)를 했다. 제야가 지나면 한 해 동안 액운을 물리치고 안녕을 빌기 위해 문배(門排)나 세화(歲畵)를 내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삶에 느닷없는 불행이 닥치지 않길 바라는 기원이었다. 한 해의 거래관계를 청산하려고 이날 밤중까지 빚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대신 자정 이후 정월 보름까지는 빚 독촉을 하지 않았다.

요즘엔 서울 종로의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제야를 맞는다. 보신각 종은 조선시대 밤 10시 인정(人定)과 새벽 4시 파루(罷漏)에 도성문을 닫고 여는 것을 알리던 종이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보신각을 다시 세운 1953년부터 제야의 종으로 쓰고 있다. 보물 제2호인 옛 종은 균열이 생겨 198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지금의 종은 국민성금을 모아 새로 만들었다. 종을 33번 치는 데는 까닭이 있다. 33이란 수는 불교 33천(天)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체,또는 우주를 뜻한다고 한다. 온 세상에 새해를 고한다는 의미가 담긴 셈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우리민족 모두를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는 누그러지고 있으나 실업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다. 정치는 편싸움 수준에 머물러 국민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준다. 이념갈등 노사문제 등도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도 팍팍함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래도 참고 견디면 봄은 올 것이다. 근심 걱정,서운함은 제야에 모두 털어내고 산뜻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