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린더를 빼곡히 채웠던 송년회 시즌도 나흘 남은 올해와 함께 저물어간다. 우리 경제가 글로벌 위기를 딛고 선방(善防)했다는 사실이 여러 송년회의 공통 화제였지만,아쉬움과 개탄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어느 이슈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표류를 거듭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걱정이 특히 컸다. 핵심 고위공직자는 나라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한 정치권의 상황을 '오너십(ownership) 부재(不在)'란 한마디로 정리했다. 주요 정치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회의장 점거와 같은 깽판치기 이외의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한 야당에 대해 특히 그런 평가를 내렸다.

몇몇 모임에서는 기업들의 약진을 되새기며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오너십'을 화제에 올렸다. 올해가 시작될 때만 해도 기업들은 '패닉'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급변하는 대외 변수에 쫓기면서 사업계획을 수시로 바꿔야 했던 일부 기업들에선 '쪽대본 경영'이란 신조어(新造語)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게 기업 오너들의 결단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대량실업에 직면하면서 자동차시장 붕괴위기에 몰리자,신차 구입자가 일자리를 잃을 경우 자동차를 되사준다는 승부수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탄탄하게 다진 품질과 디자인에 경쟁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마케팅 전략이 더해지면서 현대차는 주요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삼성은 추락을 거듭하던 반도체시장에서 뚝심 있게 투자를 지속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돌려놨고,휴대폰과 TV 시장에서 경쟁자들의 허를 찌르는 신제품 마케팅으로 승자의 자리를 굳혔다. LG는 GM의 차세대 자동차에 들어갈 2차전지 단독 공급업체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런 얘기를 종합하는 자리에서 한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는 '오너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연초 글로벌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경영계획을 보고하자 그룹 회장은 불문곡직(不問曲直),"목표를 10% 이상 높여라.구체적인 방법은 당신이 고민하고,지원이 필요한 게 있으면 보고하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지만,죽기 살기로 계획을 다시 짜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먼 훗날에 대비해온 오너십이 뒷받침됐기에 올해의 '대반전(大反轉)'이 가능했다는 얘기도 여러 자리에서 나왔다. 현대자동차가 10년 전 새 출발하면서 '품질 혁명'에 승부를 걸고,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10년 10만마일 보장'이라는 배수진을 쳤을 당시만 해도 무모한 도박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불가능에 도전한 정몽구 회장의 품질 혁명 드라이브가 아니었다면 올해와 같은 성취는 불가능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삼성이 올해 그룹 회장의 공백상태에서 약진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도 평가는 비슷했다. 2000년대 초반 삼성이 반도체와 금융부문 등의 대호황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이건희 전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10년 뒤 삼성이 무엇으로 먹고살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밤잠을 이룰 수 없다"며 CEO들을 다그쳤다.

소유가 전제돼야만 오너십이 성립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책임진 조직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책무를 다하는 게 오너십이다. 역사가 기억하는 성공한 지도자들에게 공통된 DNA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오너십 바이러스'가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이학영 부국장 겸 산업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