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글로벌 금융위기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지난해 말,이재현 CJ그룹 회장은 CJ미디어의 2009년도 경영계획을 보고받았다. 방송광고 수입이 급감해 연간 500억원의 적자를 예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회장은 "콘텐츠 제작에 투자를 줄이지 말고 공격적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대부분 경영자들이 잔뜩 움츠려 투자를 줄이기 급급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CJ미디어의 오락채널 tvN은 비용부담이 큰 자체 제작을 늘리면서 '롤러코스터'로 시청률이 4~5%에 이르는 대박을 냈다. 올해 적자폭은 당초 예상의 4분의 1인 13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CJ 관계자는 "이 회장의 '비전'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쪼그라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2.음악채널 엠넷(Mnet)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는 지난 10월 케이블 사상 최고인 8.47%의 시청률을 기록,웬만한 공중파 방송을 앞질렀다.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40억원을 쏟아붓고 그룹연수원,CGV영화관 등을 총동원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엔 이미경 CJ그룹 미디어 · 엔터테인먼트 총괄 부회장의 든든한 지원사격이 있었다.

이재현 회장과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 남매의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경영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단기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 비전 아래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회장은 평소에도 "1~2년이 아니라 10년 앞을 내다보고 사업하라"고 임직원들을 독려한다. CJ는 1995년 문화사업에 뛰어든 이래 14년간 외환위기,카드사태 등 숱한 우여곡절에도 투자를 거듭해온 국내 유일의 기업이다. 외환위기 당시 삼성,대우 등이 문화산업에서 철수했고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엔 기업마다 문화 투자부터 줄인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지금까지 CJ는 2000여억원의 누적 적자를 내면서도 문화산업에 1조4000여억원을 투자했다.

얼핏 무모해보이는 CJ의 투자는 국내 문화산업에 굵직한 역사를 써왔다. 외환위기 직후 영화 '공동경비구역(JSA)'(583만명)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불을 댕겼고 올 들어선 '해운대'가 1139만명을 끌어모으며 침체된 영화계에 희망을 안겨줬다. 국내 가요제에 불과했던 '마마(MAMA · 엠넷뮤직어워드)'가 올해 처음으로 일본 중국 등 아시아 10여개국에 동시 생중계되며 글로벌 가요제로 부상했다.

극장 문화도 바꿔놨다.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인 CGV를 설립,불결하던 극장을 청결한 유희공간으로 변모시켰다. CGV는 중국에도 진출했다. 신동휘 CJ그룹 상무는 "온미디어를 인수한 것은 비좁은 국내 시장 1위에 안주하려는 게 아니라 글로벌 미디어 ·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이 회장의 비전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일찌감치 문화산업을 그룹 미래를 좌우할 신성장동력으로 지목했다. 수시로 "문화산업은 21세기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며 "흥(興)과 정(精)을 지닌 한민족의 정서를 기반으로 전 세계 문화콘텐츠산업을 선도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해왔다. 내수 위주의 국내 문화산업은 영세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면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처럼 사업다각화와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를 위한 첫걸음이 원천 콘텐츠(프로그램 제작)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문화산업은 이 회장이 늘 강조하는 '온리원(Only One)' 정신과 맞닿아 있다. '최초의(The First),차별화한(Differentiation),최고의(The Best)'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자는 것이 온리원 정신이다. 이 회장은 직원들과 마주할 때마다 "끊임없이 변신하는 문화가 CJ의 DNA"라며 '크리에이티브'를 역설한다.

그의 비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이미경 부회장이다. 이 회장이 큰 그림을 그리면 이 부회장이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실행한다. 남매의 팀워크가 한국의 문화산업을 어엿한 수출상품 반열에 올렸다.

이 부회장은 "지금의 그룹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사업은 일찌감치 이 회장이 구상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삼성에서 계열분리한 직후인 1995년이었다. 이 회장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등이 설립한 '드림웍스'에 투자하기 위해 미국 관계자를 만나러 가던 비행기에서 "멀티플렉스,영화 제작 · 배급,방송사까지 만들겠다"고 동승한 이 부회장에게 다짐했다.

이 회장은 드림웍스에 3억달러(당시 환율기준 약 2300억원)를 투자하며 영화사업에 나섰다. 1994년 당시 CJ그룹 자산이 1조원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사운(社運)을 건 '결단'이었다. 이후 CJ그룹은 영화 제작 · 투자 · 배급을 담당하는 CJ엔터테인먼트,국내 최초 멀티플렉스극장 CGV,방송프로그램 공급업체 CJ미디어,음악유통사 엠넷미디어 등 영화 · 극장 · 음악 · 방송 분야를 차례로 갖춰나갔다. 24일에는 4345억원을 들여 온미디어마저 인수해 '아시아 넘버원 엔터테인먼트 · 미디어 그룹'을 향해 한발 더 내디뎠다.

유재혁/최진석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