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는 최초이지만 사실 남자들은 이미 걷고 있는 길이잖아요. '내가 남자여도 가능했을까' 하고 자문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

최근 삼성그룹 최초의 여성 부사장에 오른 최인아 제일기획 부사장(48 · 사진)은 20일 "'자리'에 취하는 일을 경계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84년 카피라이터 공채로 입사,26년 만에 국내 최대 광고회사의 부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2000년 최초의 여성 임원(이사보)에 이어 10년 만이다.

최 부사장은 삼성에서 늘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2001년 첫 여성 상무보,2002년 제일기획 1대 마스터(광고 대가),첫 여성 전무(2007년) 등 이력이 화려하다. "제 자신이 하나의 '샘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로 인해 기존에 없던 일들이 생기고,또 이로 인해 저는 뒷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거죠."

사실 제일기획은 최근 2~3년 전부터 크리에이티브(창의성)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낙회 사장(공채 2기)과 최 부사장(공채 8기)이 각각 CEO(최고경영자)와 제작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말단 사원으로 출발해 현장을 두루 경험한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는 최상의 파트너인 셈이다.

최 부사장은 자신의 손을 거친 수백편의 광고 중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베스띠벨리의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와 삼성카드의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를 꼽았다. 이들 카피는 사실 그가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스스로에게 되뇌였던 말이기도 하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리천장'을 느꼈고 앞이 막혔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며 "(회사가) 나를 쓸 수밖에 없게끔 만들자고 수없이 다짐했다"고 말했다.

최 부사장은 제작본부장(전무) 시절 꼼꼼한 스킨십으로도 유명하다. 매분기 인사평가 때마다 팀장들에게 팀원들의 장단점을 A4용지 한 장에 빼곡히 적도록 했다. 직원들이 평소에 고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승진한 직원의 가족들에게 카드도 보냈다. "누군가 승진하면 아내나 부모님께 카드를 직접 썼습니다. '주말도 반납하고 일한 OO아빠를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게요. 다들 좋아하시더군요. "

최 부사장은 앞으로 제일기획을 '기회가 많은 조직'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조직에서 본인을 알아준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광고산업이라는 게 공장이나 기계를 돌리는 곳이 아니잖아요. 결국 개개인이 회사입니다. 후배들이 잠재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일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가 광고계에서 시장 점유율 이상의 지배력을 보이는 것도 구성원들의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취미는 독서와 카운슬링.책에 빠져들 때와 상대방의 고민을 들어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여자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것.그는 "돌이켜보면 그동안 수없이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선배들이었다"며 "헤맬 때는 외롭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면 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