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bo Life(교보생명)!"

지난 11월11일 싱가포르 팬퍼시픽호텔에서 열린 제10회 '2009 아시아 보험산업대상' 시상식.국제 보험 저널인 아시아인슈어런스리뷰가 주관하는 이 상의 '아시아 최고 생명보험사' 수상자로 호명된 순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56)의 머릿속엔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HSBC 스위스리 뮌헨리 등이 받아온 이 상을 국내 최초로 받게 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신 회장이 2000년 5월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을 때 외부에선 기대보다 우려가 많았다. 창립자인 신용호 명예회장의 투병으로 1996년 교보생명 부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의학만 생각해 온 산부인과 의사(서울대 교수)였다. 게다가 교보생명은 외환위기를 맞아 창사 이후 최대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보험업계엔 단기 영업실적을 위해 고객과 회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저축성 보험을 밀어내기 식으로 파는 관행이 만연했다. 교보생명도 마찬가지였다. 고객 이탈이 많았고 민원도 끊이지 않았다.

단체보험을 따내기 위해 대기업 등에 막대한 금액을 대출해 주던 관행은 대우채권 부실 사태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교보에 2조4000억원이 넘는 부실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몸집을 키우는 데 급급해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영업한 결과였다.

신 회장은 '나쁜 성장'의 악순환을 끊겠다고 나섰다. '변화,혁신'을 표방한 그는 패러다임을 양에서 질로 바꿨다. 공급자 중심,관리 중심의 사고를 고객 중심,현장 중심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단기 저축성 보험보다는 중장기 보장성 보험을 팔고,설계사에겐 단 한 건을 팔아도 제대로 팔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관행에 찌든 기업문화를 혁신했고 2만여명의 정예 설계사를 육성했다.

그 결과 영업실적이 크게 줄었다. 삼성생명과 대등한 수준이었던 외형은 대한생명에도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업계에선 "산부인과 의사가 회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설계사를 포함해 회사 내부의 반발도 커졌다.

하지만 신 회장에게 '덩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임직원 모두가 변화를 공감해야 회사가 바뀐다'고 생각해 충격 요법을 썼다. 연수원에 임직원을 모아 놓고 전략회의를 하던 중 방송을 통해 "교보생명이 금융감독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는 내용의 긴급 뉴스를 내보냈다. 2000년 2540억원의 사상 최대 적자 속에 부도설,매각설 등이 나오던 때였다.

모두가 극도의 긴장감 속에 집중할 때 신 회장은 "변화와 혁신이 아니면 죽는다"고 역설했다. 가상뉴스란 게 곧 밝혀졌지만 충격과 전율은 가시지 않았다. 모두가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같은 깜짝 쇼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사원을 변화와 혁신의 주체로 만들려는 신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신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의사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환자의 병을 고치려면 정확한 진단과 처방,시술이 필요한데 이는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기업 내의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의 청진기와 같다"며 현장과의 의사 소통을 강조한다.

실제로 신 회장은 취임 직후 '현장에 답이 있다'며 임원부터 지점 직원까지 함께 등산을 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설계사들의 고충을 알기 위해 3주간 설계사 교육을 받기도 했다.

또 사내 인트라넷에 '회장 잔소리 코너' 등을 만들어 의견을 직접 올리고 매주 사내 방송의 'CEO초대석'에 출연해 경영 현안을 설명했다. 지금도 분기별로 지역영업본부를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고 있다. CS(고객 만족)혁신협의회는 지점장 과장 등을 참여시킨다. 연말이면 바자회 등을 통해 직원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열창하기도 했다.

'변화,혁신'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저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일부 보험사들이 고금리 저축성 보험의 해약을 유도할 때 교보는 예외였다. 2004~2005년 증시 급등으로 변액보험이 시장을 휩쓸 때도 보험의 본질인 '보장성 보험' 판매에 집중했다. '영업이 안된다'며 내부 불만이 들끓었지만 지난해 금융위기가 오자 신 회장의 전략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교보는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2916억원의 순이익을 내 생보업계 1위를 차지했다. 2000년 이전에 한 해 1000억원의 흑자를 내기도 어려웠지만 2004년부터는 매년 2000억~4000억원대의 순이익을 꾸준히 내는 회사가 됐다. 자산은 2000년 25조원에서 올해 50조원으로 불어났다.

보험업계에서 고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13회차 보험 유지율(보험 가입 후 13번째 달까지 보험료를 내며 유지한 계약의 비중)도 지난해 83%를 기록,10년 전에 비해 23%포인트 이상 뛰었다. 설계사 정착률도 업계 최고 수준이다.

신 회장이 '나쁜 성장'을 대대적으로 수술해 '좋은 성장'으로 회복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경영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매진한 결과다. 어릴 때부터 완벽주의를 추구해 온 성격은 그를 러닝머신 위를 달리면서도 CNN을 듣도록 만들었다.

회장이 된 뒤 좋아하던 술과 담배,골프를 몽땅 끊었을 뿐 아니라 쉬면서 TV를 볼 때도 어느새 경영을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 이종격투기 중계에선 자신의 특기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권투를 잘하는 선수가 레슬링을 잘하는 상대방의 전술에 말려 레슬링으로 승부를 걸면 절대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보가 보장성 보험에 집중하는 이유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선 통치의 리더십을 배웠다고 한다. 한 장수가 퇴군할 때 부상당한 부하를 죽이려 하자 덕만이 '부상당한 사람을 제발 살려서 데려가십시오.그것이 우리가 대장에게 충성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대장이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기업의 리더로서 부진한 직원을 이끌어 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는 반성을 했다"고 신 회장은 말했다.

보험업계 입문 15년,대표이사 10년이 지나 신 회장은 이제 자칭타칭 '보험도사'가 됐다.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은 연수를 받지 않아 효력이 사라졌다고 한다. 2000년 이후 전문경영인과 공동으로 맡아 오던 대표이사도 2006년부터는 단독으로 맡고 있다.

그는 이제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고령화 저출산으로 인한 파도가 생명보험사에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그동안 여러 경영 현안에 치여 고령화 등 향후 닥칠 변화에 대한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다"며 "이제 자체 금융연구소를 키워 고령화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보생명은 고령화에 대비하기 위해 우선 종신보험과 연금보험을 같은 비율로 판매하고 있다. 한쪽에 치우칠 경우 미래 회사 수익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신보험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이 나가는 상품이고 연금보험은 오래 살았을 때 나가는 상품이어서 보완적이다.

신 회장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다. 잘 쓰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금융사 CEO로 돈 버는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른 뒤 은퇴를 하게 되면 공익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일보다 돈을 잘 쓰는 일에 더 치중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그는 현재 공익재단인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산(大山)은 아버지인 신용호 창업자의 호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