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경영권 보호에 대한 다음의 대립하는 주장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주장 A : 증권시장을 통한 기업 경영 감시 제도는 선진화된 경제에서 매우 중요해. 대주주의 횡포를 막고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증권시장을 발전시키고 기업의 적정 주가를 발견해가는 고유의 기능도 있지. 대주주 경영권 보호는 자칫 권리 위에 잠자는 게으른 자본을 만들어 내고 자본의 생태계에서도 먹이사슬의 균형을 상실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어.

주장 B : 과도한 주주평등주의는 기업의 경영권을 기업가로부터 빼앗아 소액주주나 펀드 매니저들의 손에 넘겨주는 꼴이야. 결국 기업가들은 지분의 하락을 초래하는 투자를 회피하게 되고 자사주 매입이나 고배당을 하면서 기업의 투자여력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게 돼. 기업가들이 위험감수라는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경영권 보호가 필요해.


위 주장에 대한 보완적 설명으로 다음 중 타당하지 않은 것은?

① 주장 A는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의결권 차등화에 반대할 것이다.

② 주장 B는 경영권 방어 수단인 포이즌 필의 도입에 찬성할 것이다.

③ 주장 A는 적대적인 기업 인수·합병(M&A)의 활성화에 찬성할 것이다.

④ 주장 B는 최근의 투자부진이 증권 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⑤ 주장 A는 기업가와 투자가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고 있다.

해설

['테샛' 공부합시다] 기업 경영권 보호가 먼저인가 감시가 먼저인가?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 대기업 오너의 전횡을 막고 기업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견제장치를 도입했다.

최근 은행권을 중심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사외이사제를 비롯해 소액주주들이 특정 이사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 도입,소액주주들이 오너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주주대표소송 요건의 완화,감사 선임시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등이 실시됐다.

이런 제도를 통해 소액주주들이 증권시장을 통해 재벌 오너의 전횡을 견제하는 소액주주운동이 시민단체를 통해 활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업들이 배당금 지급,자사주 매입 등으로 주주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단기 성과에 매몰된 나머지 투자를 소홀히 하고 기업의 장기목표를 도외시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고 기업 투명성도 높아지면서 주주자본주의의 부작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주장 A는 대주주의 경영권 보호보다는 증권시장을 통한 기업 경영 감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반면 주장 B는 과도한 주주 평등주의 때문에 기업이 단기성과에 집착하고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등 주주가치를 높이는 정책으로 장기 투자가 외면받는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주장 A는 투자자가 기업가를 견제하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둘 사이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의결권 차등화나 포이즌 필 도입에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정답 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hj@hankyung.com

-------------------------------------------------------------

< 이승훈 교수의 경제학 멘토링 >

공평성의 정치경제학

성과의 균등 분배보다 기회의 균등이 바람직

희소한 자원이 어느 몇 사람만의 전유물로 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당하다.

자원배분은 효율적이면서도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공평성은 결국 누가 좀 더 가지고 누가 좀 덜 가져야 한다는 논의로 귀결되기 때문에 효율성과는 달리 만장일치의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얼핏 생각하면 희소한 자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는 균등배분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커피 한 잔을 더 좋아하는 나와 사과 한 개를 더 좋아하는 너에게 똑같이 커피 반 잔과 사과 반 개를 강요하는 균등배분은 비효율적이다.

균등성의 원칙을 조금 완화하면 소득을 균일하게 나누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각자 똑같은 소득을 얻으면서 그 돈으로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을 사도록 허용한다.

이를테면 너의 커피 반 잔을 나의 사과 반 개와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균일한 소득분배는 효율성을 보장한다는 면에서 균등배분보다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균일한 소득분배가 과연 공평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평성의 기준을 '같은 사람은 같이 대우하고 다른 사람은 달리 대우한다(Equals should be treated equally,and unequals unequally.)'로 정의했다.

예컨대 20대 독신청년 철이와 일찍이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부양하는 40대 가장 김씨 아줌마의 소득을 똑같이 책정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인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김씨 아줌마의 소득이 철이보다는 더 많아야 하지만,초등학생인 아이를 어른과 어떻게 달리 대우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어른과 아이는 분명히 다르지만 이 다름을 어떻게 분배에 반영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다름을 달리 대우하는 기준에 합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아이의 몫은 어른보다 적어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지만 몇%여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공평성을 균일분배로 고집하면 모두 다 함께 더 좋아지는 협력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각자 혼자 일할 때 철이는 10을 생산하고 영이는 16을 생산하지만 둘이 분업해 협력하면 합계 30을 생산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 균일분배의 원칙을 적용하면 각자 15를 가지게 되어 영이의 몫은 단독 생산 때의 16보다 오히려 더 줄어든다.

이러한 분배를 찬성할 리 없는 영이는 분업 참여를 거부할 것이다.

분업을 하더라도 철이와 영이에게 각각 10과 16을 보장한 다음에 추가 생산물 4(=30-10-16)를 적절히 나누도록 분배규칙을 정해 두어야 영이의 분업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후적 성과의 분배가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분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어렵다.

성과를 균등하게 나누는 방식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한 공평성을 실현시킬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shoonle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