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은 28세에 문과에 급제,암행어사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를 지냈다. 정조대왕 사후 신유사옥에 연루돼 18년을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보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지쳐 제풀에 쓰러졌을 세월이지만 그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외롭고 궁핍한 삶에 아랑곳하지 않고 치세와 제민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틈틈이 채소를 가꾸고 뽕나무를 키우면서 터득한 것들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혼자 지내는 내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학연 · 학유)과 둘째형(정약전) 및 제자들에게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가장 많은 건 아들들에게 보낸 것으로 무엇보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한다. '집에 책이 없느냐,몸에 재주가 없느냐,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작정이냐.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문장가가 되는 일은 꺼릴 게 없지 않으냐.'

그는 부디 기상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선 안된다. 사나이는 가슴 속에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가을매의 기상을 품고 천지를 작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

또 비밀을 만들지 말고 과음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술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데 있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토하고 잠에 곯아떨어지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술 좋아하는 사람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하는 수가 많다. …바라노니 딱 끊고 마시지 않도록 하라.'

둘째형에겐 부디 현실적이 되라고 조언했다. 섬의 들개를 잡아 먹으면 기운을 잃지 않을 거라며 요리법까지 상세히 적었다. '들깨 한 말을 부쳐드리니 볶아 가루로 만드십시오.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

영암군수 이종영에겐 이렇게 썼다. '상관이 엄한 말로 위협하는 것,간리가 조작한 비방으로 겁주는 것,재상이 부탁으로 나를 더럽히는 건 모두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런 다산의 미공개 서한 13통이 새로 발견됐다고 한다. 다산의 편지는 어떤 처지에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은 물론 일반 백성과 함께 살아가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 이의 절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시대에 상관없이 가슴을 치는 이유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