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기록을 따르지 못한다. 기억은 잊혀지고 왜곡될 수 있지만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되살려낸다. '뇌를 움직이는 메모'의 저자 사카토 겐지는 메모를 함으로써 뭐든 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야 창의적 발상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뇌도 비워야 움직일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노트 한 권으로 끝내는 메모력'을 쓴 오쿠노 노부유키는 일단 노트에 하라고 권한다. 사용하기 편하고,돈도 안들고,갖고 다니기 좋고,언제 어디서든 들춰볼 수 있다는 이유다. 방법은 간단하다. '뭐든,시간 순으로,한 곳에 다 적어라.놀라고 당황했던 일도 기록하라.'

그래야 찾아보기 쉽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떠올림으로써 일의 앞뒤를 판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왜 아니랴.메모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개선책을 강구하게 만든다.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도 마찬가지다. 직원 개개인의 지식과 경험을 담은 메모를 모아 공유하면 조직의 역량을 높이는 아이디어와 혁신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일하면서 겪은 선험이나 얻은 정보를 윗사람은 물론 동료나 아랫사람과 나누면 좋으련만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대신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나도 고생해서 안 건데 쉽게 알려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담당자가 바뀌면 업무의 내용과 흐름을 파악하느라 한동안 생고생을 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일을 막자면 구성원들의 메모를 집대성하는 일이 필수라고 여긴 걸까. 직원들에게 일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적자생존(적는 자가 살아남는) 시대가 온 셈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많은 메모와 기록도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 소용 없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하고,좋은 제안을 한 사람에겐 따로 보상하며 무엇보다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

애써 올린 내용에 대해 "사소하다,우리도 해봤는데 별 것 없었다"는 식으로 대응하면 의욕이 줄어들 것이다. 적자생존은 원래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단순히 적는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적은 걸 제대로 파악하고 정리하고 고루 활용하는 자가 이긴다. 안그러면 적지도 않을 테고 적어봤자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