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에 발목이 잡혀 일본 제약산업은 지난 15년간 제자리걸음만 했습니다. "(미야자와 세이지 일본제약협회 대외협력부장)

연매출 770억달러(89조원)에 세계시장 점유율 2위.일본 제약산업의 현주소다. 업계 1위인 다케다의 지난해 매출은 137억달러(16조원)로 우리나라 제약업체의 전체 매출보다 많다. 우리나라는 한 개도 없는 '글로벌 슈퍼 블록버스터(연매출 1조원 이상)'를 일본은 17개나 갖고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내용은 달라진다. '저성장 트랩'에 갇힌 일본 제약산업의 뒷모습이다. IMS헬스(국제의약품유통조사기구) 통계에 따르면 일본 제약산업의 세계시장 비중은 1994년 21.6%에 달했다. 그러나 지난해 10%로 반토막이 났다. 같은 기간 세계 의약품 시장 규모가 2500억달러에서 7730억달러로 세 배 이상 증가한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다.

일본은 3~4% 안팎의 느림보 성장을 이어오며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신흥시장의 상당 부분을 미국 유럽 중국 업체들에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 제약업체들이 이 기간을 '잃어버린 15년'으로 부르는 이유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정부의 까다로운 심사 규제,신약개발 지연,부족한 임상시험 인프라,의료비 지출 중 약제비 감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약업체들은 무엇보다 정부의 경직된 약가정책을 저성장의 주 요인으로 꼽는다. 정부는 보험지급 대상으로 지정된 약품의 경제성을 2년마다 평가,4~6%씩 약값을 깎는다. 우리 정부가 도입을 추진중인 의약품 저가구매 인센티브제도 이같은 약가인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히로아키 나카타니 일본 제약협회 상무는 "꼬박꼬박 약가를 내리다 보니 15년 새 평균 약값이 50%나 떨어져 매출이 정체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나마 수출 확대와 대형 제약사 간 M&A 등 제약업체들의 자구 노력이 없었으면 세계 2위의 위상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는 게 일본업계의 평가다.

이런 가운데 일본 정부가 제약산업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법 찾기에 먼저 나섰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내각부,문부과학성,후생노동성,경제산업성 등 관련 부처가 모두 나서 2006년 관 · 민위원회를 전격 구성한 것.이후 매년 두 차례씩 업계 대표들을 만나 합리적 약가인하 방안과 성장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그 결실이 2007년 4월 제2차 회의 직후 발표한 '혁신적 의약품 · 의료기기 창출을 위한 5개년 전략'이다. 연구지원 예산을 5년간 3500억엔에서 7000억엔으로 두 배 늘리고 신약심사를 신속히 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미야자와 부장은 "신약만큼은 특허 만료시까지 약값을 깎지 말아 달라는 업계의 요구에도 서로 긍정적인 의견 접근을 본 상태"라며 "관 · 민대화를 통해 업체들이 신약개발 의욕에 상당한 자극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약가 인하를 통한 공익적 재원 마련과 성장동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갈 길이 먼 국내 제약업계는 여전히 약가에 발목이 잡혀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 대국민보고대회에서 '2018년까지 매출 3조원 이상 글로벌 제약사 3개,1조원 이상 제약사 10개 이상을 배출해 세계 7대 제약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실행전략은 내놓지 않고 저가구매인센티브제 등 약가인하 정책만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당근 없이 채찍만 휘두르고 있는 셈이다.

야기 다카시 일본의약산업정책연구소 주임연구원은 "한국 제약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업체당 연간 2000억원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춰야 한다"며 "규제부터 강화할 경우 성장은커녕 생존도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