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같은 마패(馬牌)를 햇빛 같이 번듯 들어 암행 어사 출도(出道)야! 외는 소리.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눕는 듯,초목 금수(草木禽獸)들 아니 떨랴.암행어사 출도 남문에서 동 · 서문 출도 소리 청천에 진동하고….''

춘향전'의 어사출두 장면에 나오는 마패는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이다. 역졸이 마패를 번쩍 들어 보여주면 뒤가 켕기는 육방 관속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죄가 중할 경우 파직까지 당했다. 오죽하면 강산이 무너진다고 했을까.

마패는 원래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에게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는 증표였다. 앞면에는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말의 수를,뒷면에는 자호(字號)와 연월일,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초기 마패의 재료는 나무였지만 자주 파손되자 나중엔 구리로 바꿨다. 새겨진 말의 수는 1마리부터 10마리까지 다양했으나 암행어사들은 보통 말 3마리의 삼마패를 지녔다.

조선시대엔 대략 670여명의 암행어사가 있었다고 한다. 어사의 본보기 격인 박문수를 비롯 퇴계 이황,다산 정약용,정암 조광조,서포 김만중도 어사로 활약했다. 추사 김정희 역시 전 · 현직 수령 10여 명의 비리를 파헤쳤을 정도로 강직한 어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모든 어사가 박문수처럼 모범적이었던 건 아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도덕적 해이가 심해진다. 순조 시절 평양에서 올라온 상소문중 이런 것도 있었다. '일부러 마패를 노출시켜 사람들이 알도록 합니다. 기암 절승지와 이름난 절간을 찾아 놀이를 일삼으니 가는 길목마다 그 고을에서 금방 알아차리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런 어사는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고 백성들에게 해만 끼칩니다….'

얼마 전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직원 모두 어사 박문수가 된다는 기분으로 일하고 위원장이 이재오란 사실을 마패로 생각하라"고 하더니 이번엔 검찰이 체포나 압수수색 때 '검찰 배지'를 달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경찰과 달리 제복이 없어 신분을 드러낼 상징이 필요하다는 얘기지만 배지가 '현대판 마패'로 오 · 남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가시지 않는다.

사적인 용도로 쓰다 적발되면 대검 예규에 따라 제재한다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엄정한 관리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배지에는 말 대신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의 방패 문양을 새겼다니 그 뜻을 얼마나 살려갈지 지켜볼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