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공부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한 첫날 본 NHK TV 뉴스는 아직도 필자의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나카소네 총리가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부임하면 거대한 관료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높은 벽을 뚫고 자민당의 개혁 의지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사명입니다"라고 말하는 톱뉴스였다. 당시 한국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로 모든 행정이 "대통령 지시에 의거"로 시작하던 톱다운 행정에 익숙해 있던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같이 '사무차관회의 합의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강한 관료 시스템은 안정에는 기여하고 있었지만 변화와 개혁에는 벽이었다.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들은 하나같이 논쟁만 일어나고 미루어질 뿐이었다. 초등학교 교과서 통합이란 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가 수년간 논쟁을 하다 양 진영의 대표가 합숙토론을 통해 끝장내자는 것이 빅뉴스가 되더니,결국 한 달 만에 나온 것은 통합은 하되 그 기준과 원칙은 지속적으로 논의해 보겠다는 한 페이지의 발표였다. 이에 실소를 하면서 한국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이미 시행하고 있다는 말을 건네는 일본 친구와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때 일본은 제2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서 미국과 필적하던 시절이었고,한국은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던 시점이라서 항상 일본의 의사결정 제도나 문화는 바람직하고 한국의 그것은 바람직스럽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였다. 그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한국은 민주화를 거쳤고,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오히려 거꾸로 돼 있는 것 같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몇 년 전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도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는데,지금의 민주당 하토야마 내각의 개혁 드라이브는 일본이 선진국임을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사무차관회의 폐지,정부의 지방출장기관 폐지,낙하산 2만개 폐지 등 엄청난 과제들을 시행해 나가고 있다. 그 속도가 우리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같다면 무리일까.

반면에 우리는 민주적 절차라든가 과거 사례라는 형식적인 틀에 얽매여 정책 결정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지 않나 싶다. 더 큰 문제는 많은 논의를 거쳐도 입법 과정에서 사전 논의를 왜 했나 할 정도로 또 다른 정치 격돌을 겪으면서 시기도 놓치고 방향도 왜곡돼 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종래 우리의 최고 경쟁요소였던 '빨리 빨리'는 정책 분야에 관한 한 그 탄력을 잃은 지 오래인 것 같다.

경쟁은 상대적 속도전이다. 시간당 100㎞를 달린다 해도 시간당 200㎞나 300㎞를 달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가는 것이다. 최근 4대강 논란을 지켜보면서 한 · 중 · 일 3국이 정책 분야에서 달리기 경쟁을 한다면 우리의 속도가 시간당 100㎞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기우였으면 한다.

김병일 <여수세계박람회 사무총장> kimparis2000@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