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부터 나흘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ABAC(APEC 기업인 자문위원회) 회의에 다녀왔다. 제20차 APEC(아시아 · 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기간에 함께 열린 이번 회의에는 21개 회원국 63명의 대표를 포함해 300여명의 기업인과 경제전문가 등이 위기 이후 세계경제 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참석자들은 특히 아시아 경제의 빠른 회복 그리고 세계경제의 축이 미국,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역동적인 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APEC의 민간기업 자문기구인 ABAC 회의는 매년 네 차례 열리는데,특히 정상회담 중 열리는 연말 회의 때는 APEC SME(중소 · 중견기업) 서밋을 갖는다. 중소 · 중견기업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은 대기업 대표 2명과 함께 필자가 중소기업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올해의 주제는'강하고,지속가능하며 균형된 경제성장'이었다. 그중에서도 중소 · 중견기업의 생존과 지원,그리고 균형 발전을 향상 · 지속시킬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와 건의가 이뤄졌다. 또 금융위기로 인해 중소 · 중견기업들이 가장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점을 절감하고 이들을 위한 긴밀하고 지속적인 지원과 발전방안이 제시됐다. 구체적으로는 올해부터 2012년까지 개발 추진될 전략적 우선계획으로 혁신,기업환경 조성 등 6가지를 뽑았다.

필자는 모든 나라들이 중소 · 중견기업의 중요성을 실감하고,이들의 육성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양적으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편이다. 한국의 정책을 설명했더니 많은 참석자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문제는 한국은 중소기업들이 세계적인 중견기업으로 발전하도록 의욕을 북돋워줄 유인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은 일정 규모가 되면 한순간에 모든 지원과 혜택이 끊기고 만다. 너무 칸막이가 엄격해 중소기업들은 더 이상 규모를 키우지 않으려 한다. 규모가 커지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또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이 현실을 잘 말해준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선순환 없이는 한국경제의 발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부작용을 막고 건실한 중견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연구개발(R&D)투자, 특히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는 투자에 대한 지원이다. 중견기업이 적극적으로 경쟁력의 핵심인 R&D에 투자할 수 있도록 중견기업이 주도할 수 있는 R&D 정책자금 조성이 필요하다.

둘째,글로벌 중견기업을 위한 맞춤형 수출지원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마케팅 전략,디자인,특허지원 및 시장조사 지원 등이 이뤄져야 한다.

셋째,독립형 부품 · 소재기업의 육성이다. 독자적인 기술축적과 시장우위로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유수의 대기업과 거래할 수 있는 부품 · 소재기업의 출현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경제가 위기 이후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독자적인 기술과 독창적인 자생력을 축적한 이른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또는 글로벌 중견기업으로 발전해 나가는 발전경로를 정비해야 한다. 이것이 경제의 근간인 일자리 창출도 더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일방적인 지원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중견기업이 '모범적인 발전 모델'이 될 수 있는 여건과 제도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경제인들이 모인 회의 참석 이후의 느낌이다.

강호갑 < APEC 기업인자문위원회 한국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