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동네를 산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맞으려 한 다른 대학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를린대학교는 많은 특권을 부여하면서까지 교수로 초빙했으나 이것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한 가운데 사색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고 한다. 그의 정신세계는 풍성했으나 생활은 무척 단조로웠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단조로움을 용인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전쟁이 끊일 사이 없고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있으며,그 사실이 시시각각 보도됨으로써,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일들,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의 로맨스 같은 일들이 커다란 화제가 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요즘에 종종 인터넷이 되지 않는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보는 시선도 바뀌어서,이제는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필자는 단조로운 칸트의 생활을 꿈꾸며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를 산책한다. 한강이 가까이 있어 강바람을 맞으며 산책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산책 코스는 매일 같지만 상념은 매일 다르다. 산책길이 단조롭기 때문에 편안하게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다. 구경거리가 많은 길이라면 그 풍광에 홀려 사색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강물 위에 이따금 지나가는 유람선이나 물장구 치는 오리들이 잠시 내 발길을 붙잡지만,내 생각을 방해하는 일은 없다.

산책은 삶의 영약 같은 것이다. 삶이 지루하고 권태로울 때 산책을 나서라.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전환되고 신선해진다. 상처받거나 우울해질 때도 산책하라.어디서 부터인지 모르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선사받게 된다.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만났을 때나 아이디어를 구할 때에도 산책을 하라.한 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 안의 문제가 스스로 객관화됨으로써 나도 모르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괴로움이나 해결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문제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가볍게 여겨지니 참으로 신기하다.

칸트의 사색적 산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산책길에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운동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걸음걸이가 필사적이다. 두 손에 아령을 든 채 복면 수준의 마스크를 깊숙이 둘러쓰고 서둘러 걷는 폼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들이 조금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오만인가.

심윤수 < 철강협회부회장 yoonsoo.sim@eko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