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만 보다 왔습니다/당신은 없고요,나는/석남사 뒤뜰/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하아,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어찌할 줄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저물 무렵까지 나는/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히다/단풍만 사랑하다/돌아왔을 따름입니다/당신은 없고요 (최갑수 '석남사 단풍')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간다. 말 그대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우리는 그 현란함에 감탄하지만 나무 입장에서 단풍은 스트레스의 산물이다. 원인을 제공하는 건 일교차다. 낮엔 햇살이 좋아 광합성을 통해 잎에서 당분이 만들어지는 반면 밤엔 기온이 떨어지며 당분 소모량이 확 줄어든다. 과잉축적된 당분 탓에 잎의 산도가 높아져 엽록소는 파괴되고 대신 잎 속에 있던 빨강 노랑 갈색 등 다양한 색소가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나무가 겨울을 앞두고 쓸모 없어진 잎을 떨궈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단풍의 이동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산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하루 40m 정도씩,북에서 남으로 25㎞씩 움직인다. 이게 가을의 속도다. 절정기는 단풍이 산 전체의 80%를 차지할 때다. 단풍은 보통 9월 말께 설악산 정상에서 시작돼 오대산 치악산을 거쳐 소백산 월악산 덕유산 속리산 내장산까지 거침없이 번져간다. 그리고 11월 초중순께 가야산 주왕산 월출산까지 남하하면서 사라진다.

전국 명산에 단풍객이 몰리는 가운데 과천 서울동물원에선 다음달 8일까지 이색 '단풍축제'가 열린다. 가로 20m,세로 5m크기의 '단풍풀장'과 500m 길이의 '단풍거리'를 만들어 놓았고 가을시 전시,단풍사진 공모전 등도 마련된다. 또 서울시는 수변길(반포한강공원) 오솔길(망원) 물억새길(양화) 숲속길(뚝섬) 등 10곳의 한강변 산책로를 공개,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걸으며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니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있는 것은 혹독한 겨울에 대비하라는 자연의 신호다. 나무는 스스로 잎을 떨궈 추위를 견뎌낸 후 다시 새 잎을 피우는 것으로 그 신호에 응답한다. 그래서 김현승 시인은 가을을 수치와 겸양의 계절이라고 했을 게다.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며 '시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나무들의 메시지를 한번쯤 되새겨볼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