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3년 치 일감이 남았습니다. 우린 빼주세요…."국내 170여개 해운업체를 대표하는 한국선주협회는 올해 초 조선업계로부터 야박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은 조선 · 해운업계 지원을 위한 건의서를 정부에 공동으로 내자는 제안을 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한 것이다.

당시 조선업체들은 "수년 치 일감을 확보하고 있는데 위기를 대외적으로 과도하게 조장할 필요가 없다"고 이유를 댔다. 해운업체들은 이후에도 몇 차례나 조선업계에 잇따른 협조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선주협회는 어쩔 수 없이 '전략물자 국적선 수송방안 정책간담회''해양산업 지원촉구 결의안' 등 각종 현안을 홀로 추진했다.


◆"일감은 있지만…" 다급해진 조선업계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건 지난달부터다. 자금난을 겪어온 해외 대형 선사들의 파산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들 회사로부터 선박을 수주한 국내 대형 조선업체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국내 선사마저 부실해지면 그 파장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란 위기감도 커졌다.

선주협회가 지난달 벌크선,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등을 포함한 상선과 해군전투함 등을 전시하는 '제1회 모터 베슬 쇼' 기획 과정에서 조선업계는 선뜻 협조 의사를 밝혔다. 해운업계와의 공동 대응도 함께 모색하고 나섰다. 28일 국내 해운 · 조선산업 공동발전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세미나에 동참한 것.선주협회의 구애에 배짱을 부리던 조선업계는 최근 해운업계에 오히려 협조를 요청하는 모양새다.

선박 발주 및 수주를 놓고 벌이는 두 업계 간의 줄다리기 양상도 변하고 있다. 국내 해운사들의 선박 인도 연기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국내 대형 조선업체들이 입장을 바꾸기 시작한 것.해운사들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부실화되면 조선사들도 향후 무더기 발주 취소나 대금 미지급 등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전 세계 선박 인도량 급감

국내 최대 선사인 한진해운은 이미 대형 조선업체들에 발주한 컨테이너선의 인도 시점 연기를 요청한 상태다. 현대삼호중공업과 삼성중공업으로부터 내년에 각 5척의 컨테이너선을 받기로 했지만,인도 시점을 모두 2011년 초반 이후로 미루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TX팬오션도 벌크선 10여척에 대한 인도 시점을 내년 이후로 미뤘으며,추가 인도 연기 요청도 검토하고 있다. 2011년까지 벌크선 2척을 받기로 한 현대상선 역시 인수 연기를 고민하고 있다.

대한해운은 현대중공업에 발주한 초대형 원유운반선 2척에 대해 계약 변경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내년에 예정된 선박 인도 시점을 2011년 이후로 미루기 위해서다.

전 세계 선박 인도량도 급감하고 있다. 올해 초 418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에 달했던 선박 인도 물량은 최근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인도 시점이 미뤄진 선박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프랑스 CMA-CGM사,독일 페더 될레 쉬파르츠사 및 하파그 로이드사,대만 TMT사 등 글로벌 선사들에 이어 국내 선사들도 자금난으로 인해 선박 인도 연기 요청을 본격화하고 있다"며 "조선 · 해운업계의 몰락과 회생 여부가 서로 연계돼 있기 때문에,힘을 합쳐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창민/박민제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