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118조원 매출(2008년 기준)을 올리는 거대 기업 삼성전자의 출발점은 미미하고 초라했다. 국내 시장은 이미 금성사(현 LG전자)와 대한전선이 양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1972년까지는 TV와 라디오를 국내 시장에서 팔 수도 없었다. 후발업체는 수출만 할 수 있다는 '국판 금지' 규제 탓이었다. 삼성전자가 기업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1975년이다.

오일 쇼크로 온 국민이 에너지 절약에 관심이 쏠려있었던 1975년 4월.삼성전자는 '이코노 TV'라는 신제품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이 제품의 특징은 전원(電源)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화면이 켜진다는 것.20여초에 달하는 브라운관 예열 과정을 없애는 신기술을 적용한 덕분이었다. TV 수명을 2.25배 연장시키고 20%가량의 절전효과도 볼 수 있게 했다.

에너지 절약이 화두로 오른 시기였던 만큼 이 제품은 큰 인기를 끌었다. 삼성전자는 1975년 12월 3만4000대의 이코노 TV를 팔아 창사 이후 처음으로 국내 TV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일단 시작하면 어떤 사업이든 10년 안에 승부를 냈다. 반도체-LCD(액정표시장치)-휴대폰-TV 등 대부분의 주력사업들이 그랬다. 물론 시간이 거저 만들어준 것은 아니다.

순탄하게 본 궤도에 올라선 사업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금과 기술이 모자랐고,어느 때는 경쟁회사들의 강력한 견제에 제동이 걸리곤 했다. 국가 전체에 경제위기가 몰아닥쳤을 때는 삼성도 적잖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대담한 도전과 과감한 혁신을 통해 기업 역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도전'과 '혁신'은 오늘날 삼성전자를 만든 핵심 키워드다.

정공법으로 반도체 불황 돌파

1987년 9월 어느 날.조간 신문을 읽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국 반도체 기술은 모두 외국 제품 모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심기를 건드렸던 것.지병으로 걸음도 제대로 걷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이 회장은 한달음에 경기도 기흥 반도체 공장으로 달려갔다. 이윤우 상무(현 삼성전자 DS부문 부회장)와 진대제 담당(전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불벼락이 떨어졌다.

"신문 봤지? 내가 남의 것이나 베끼려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알아? 영국은 증기기관을 개발해 1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했어.우리도 마찬가지야.반도체로 한국을 먹여살리는 게 우리 목표야.정신들 차려!"

이 상무와 진 담당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64Kb D램을 양산,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1984년부터 D램 값이 폭락해 4년간 1400억원의 누적적자를 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내놓은 대안은 '추가 투자'.전형적인 역발상이었다. 호황기에 대비하기 위해 3억4000만달러를 들여 제3 생산라인을 지으라고 지시한 것.사내에 "반도체 사업 때문에 그룹이 위험하다" "회장의 판단이 흐려졌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이 회장의 결정은 옳았다. 반도체 경기는 1987년 말을 기점으로 되살아났다. 삼성은 1988년 3600억원의 흑자를 올리며 기사회생했다.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3라인을 '선대회장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부른다. 이 회장은 그해 반도체 투자를 마무리짓고 영면에 들어갔다.

휴대폰,1년 만에 역전 성공

삼성 휴대폰 역사는 1984년 일본 도시바에서 기술을 도입해 만든 카폰에서 시작된다. 지지부진했던 휴대폰 사업의 전환점은 1993년.천경준 부장(현 에스원 부사장)은 그해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주재로 열린 경영회의에서 "국내 시장에서 모토로라를 꺾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휴대폰을 이건희 회장이 주창했던 '질(質) 경영'의 대표 사례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국내 휴대폰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절대 강자,모토로라를 꺾겠다는 호언장담에는 배경이 있었다. 천 부장이 이끄는 개발팀은 3년간 대당 300만원에 달했던 모토로라 휴대폰을 10여개 사들여 속속들이 약점을 분석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도 보고,수백㎏의 무게로 버튼을 눌러보고….

천 부장은 모토로라의 약점 20가지를 추려 이 문제를 개선한 신제품 SH-700을 내놓았다. '벽돌폰'의 육중함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제품의 무게를 100g대까지 줄인 것이 특징이었다.

마케팅은 '발'로 했다. '한국 지형(地形)에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삼성전자 휴대폰 마케팅팀은 등산 전문가가 돼야 했다. 한라산,지리산,오대산 등 전국의 산을 누비며 '잘 터진다'는 점을 소비자들에게 알렸다. 명절 때는 꽉 막힌 전국 고속도로를 누비며 제품을 홍보했다.

결실을 본 것은 1994년에 나온 후속작 SH-770이었다. 디자인과 성능을 개선,'애니콜' 브랜드를 처음으로 붙인 770모델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5년 8월 삼성의 점유율이 51.5%까지 높아져 42.1%의 모토로라를 처음으로 꺾은 것은 이 제품 덕이었다. 770모델이 처음 나왔던 1994년 10월께 삼성의 점유율이 모토로라의 절반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불과 1년반 만에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난 셈이다.

경쟁제품의 약점을 분석해 개선하고,소비자들의 요구를 세심하게 반영하는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부의 전통이다. 무게 100g 미만 휴대폰(1998년),두께 1㎝ 이하 휴대폰(2001년) 등의 명작도 엇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2007년 삼성 휴대폰은 해외시장에서 2억대를 팔아 모토로라를 제치고 글로벌 2위에 올랐다.

결정은 고독했지만…

"안정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590㎜?C670㎜냐,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600㎜?C730㎜냐."

1997년 초 세 번째 생산라인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상완 전무(현 삼성종합기술원 사장)는 유리기판 사이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노트북용 패널이 점점 커지는 추세를 감안,기판의 크기를 기존 2라인(550㎜?C650㎜)보다 늘리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기판의 크기를 어느 정도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던 것.

당시 노트북 PC의 화면크기는 12.1인치에서 13.3인치로 바뀌는 추세였다. 590㎜?C670㎜와 600㎜?C730㎜ 라인 모두 한 번에 13.3인치 패널을 6장 만들 수 있어 차세대 제품 대응이 가능했다. 문제는 노트북 화면 크기가 14.1인치까지 커질 경우였다. 600㎜?C730㎜ 라인으로는 6장 생산이 가능하지만 590㎜?C670㎜ 라인에서는 이 작업이 불가능했다.

이 전무는 고민 끝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600㎜?C730㎜를 택하기로 한 것.그의 결정은 적중했다. 디스플레이 화면의 크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대형화됐고,삼성전자는 선(先)투자의 과실을 누리며 마침내 세계 1위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는 그 이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동종업계보다 한발 앞서 대형 LCD 투자에 나섰고,12년째 이 분야 선두를 지키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27.8%(매출 기준)에 달한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