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들이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대도약을 이뤘지만,그 이후를 조심해야할 것이라는 경계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안심하기 이르다는 얘기다.

환율 효과 등 외부 요인으로 인해 실적이 과대 평가된 데다 전열을 재정비한 글로벌 경쟁기업들이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주요 최고경영자(CEO)들도 이번 기회에 어떤 경영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긴장의 끈을 놓지 마라.지금까지의 좋은 실적은 환율 때문"이라며 임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지난 13일 300여명의 그룹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열린 10월 임원 세미나 자리에서 꺼낸 얘기다. 구 회장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LG가 3분기까지 양호한 실적을 거둔 것은 환율 효과에 힘입은 바 크다"고 지적했다.

LG그룹은 올 들어 전자와 화학 등 핵심 계열사들이 거의 사상 최대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성과는 상당 부분 환율 효과 때문이며,원화가 강세로 돌아서면 언제든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게 구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세계 경기와 환율 같은 외부 환경은 계절처럼 늘 변하는 것"이라며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경영환경에 주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심역량과 인재 확보에 과감히 투자하고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권 사장은 지난 13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IMID 2009' 행사장에서 "올해는 예상보다 100원 정도 웃도는 환율로 인해 효과를 봤다"면서 "내년에는 100원 이상 환율이 떨어져 그만큼 효과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내년 수요도 공급과잉이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삼성그룹 CEO들은 이달 초 열린 사장단회의에서 내년 전망에 대해 논의한 뒤 낙관할 수 만은 없다는 의견을 모았다. 내년이 올해보다는 나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내년 시장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낙관하기 어렵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며 "대체로 올해보다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시장 평균 성장률 이상의 목표를 갖고 최선을 다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삼성의 이 같은 해석은 올 하반기에 체력을 회복한 경쟁업체들이 내년에 공격적인 경영에 나설 공산이 높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비해 원가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고 내부 체질을 개선해 글로벌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다.

삼성그룹은 원 · 달러 환율 1100원에 맞춰 내년 사업계획을 마련 중이다. 환율이 1000원대로 떨어지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도 나섰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은 "강도 높은 혁신으로 1000원대 환율에도 흔들리지 않는 체질을 갖추라"고 주문했다.

현대자동차는 각국 정부의 지원정책 덕분에 내년 자동차 수요가 5%가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경쟁업체들의 반격,환율 · 유가 등의 변수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나타냈다. 정태환 현대차 재경본부장(부사장)은 "환율 1100원을 바탕으로 경영계획을 짜고 있다"며 "환율이 떨어지고 유가,금리 등이 불안해지더라도 새로 출시된 신차를 앞세워 판매를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중 내년 사업계획을 마련할 예정인 SK그룹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SK 관계자는 "각종 경제지표는 심리적인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환율 착시 현상도 무시할 수 없다"며 "내년은 미래 먹을거리를 찾는 밑그림을 완성하고 구체화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창수 GS 회장은 위기 속 기회 포착을 강조했다. 허 회장은 계열사 최고경영자 전략회의에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고 새로운 산업이 떠오르고 있다"며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경영,그리고 디테일에 강한 경영으로 기회를 포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허 회장은 또 "위기관리는 결코 방어적인 개념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