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블록(대표 한용택)은 최근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 2만2400㎡의 부지에 무려 170억원을 들여 제2공장을 지었다. 한 해 매출액(2008년 110억원)보다 많은 돈을 들여가며 공장을 신축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존 설비로는 특수 보도블록 주문량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주문을 받은 뒤 2,3개월 지나서야 제품을 납품할 정도다. 가격이 1㎡당 2만5000~3만원으로 일반 보도블록보다 5~6배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고급빌라나 아파트단지,빌딩,공원 등에 조경용으로 깔린다. 이 제품은 청와대 분수광장(5000㎡), 서울 잠실 주공 재건축아파트 4개 단지와 잠실시영 재건축 아파트 1개 단지, 강남대로 일부 등에 적용됐다. 한용택 대표는 "소위 사양업종으로 불리는 보도블록시장에서 특수 보도블록이라는 블루오션을 창출해 짧은 기간에 1등 기업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노블록은 3대 가업승계를 준비 중이다. 경원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장남 한상우씨(30)가 2년간의 현장업무를 익힌 뒤 지난 4월부터 3년간의 일정으로 일본 니코사에서 기술연수를 받고 있다.

이노블록은 영등포구치소 보안과장으로 근무하던 창업주 고 한종훈 회장(1923~2002)이 1971년 3월 영진건재란 상호로 안양에 벽돌공장을 차린 것이 출발점이다. 한 회장은 공무원 월급으로 1남2녀의 학비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힘들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임대로 마련한 5000㎡의 부지에 직원 4명이 전부였다. 한 사람이 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원재료를 삽으로 '대우찌'(벽돌 찍는 틀)에 퍼부으면 다른 사람은 대우찌를 흔들어 만드는 방식으로 하루에 1만장 남짓의 벽돌을 찍어냈다. 이렇게 만든 벽돌을 주택이나 상가 신축현장에 팔았다.

장사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당시 경제개발과 함께 건축바람이 불면서 벽돌 수요가 점점 늘고 있는 시절이었다. 안양에만 벽돌공장이 50곳이 넘었다. 한 대표는 "아버지는 시멘트 함량을 높이고 막 찍어낸 벽돌에 물을 자주 골고루 뿌리는 방법으로 견고한 제품을 만들어 납품처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았다"며 "주문물량이 많아 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연탄불을 피워가며 벽돌을 찍어냈다"고 전했다. 수작업으로는 늘어나는 주문물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83년 1공장 인근에 2공장을 짓고 1일 3만장의 벽돌을 생산하는 반자동화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 환갑을 넘긴 한 회장은 커진 회사의 경영을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자 한 대표를 1985년 5월 회사로 불러들인다. 성균관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입사해 포항과 광양공장의 고로 건설 현장감독을 하던 한 대표는 "아버지의 느닷없는 제안에 고민을 했지만 연로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도 불효인 것 같아 수락했다"고 설명했다.

과장으로 입사한 한 대표는 이듬해 2월 대표이사가 됐다. 한 회장은 "이제 모든 것을 네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며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고 물러났다. 당시 회사 규모는 직원 8명에 매출 5억원 수준이었다. 이때부터 한 대표는 남다른 경영수완을 보였다. 우선 완전 자동화 기계를 도입,1일 생산량을 8만장으로 늘렸다. 건설사, 학교 및 아파트 공사장 등 영업현장을 찾아다녔다. 1990년대 들어 200만호 주택 건설로 벽돌 수요가 늘자 2호기도 들여놨다. 한 대표는 "하루 20시간을 생산해도 주문물량을 대주지 못했다"며 "직원이 20명으로 늘고 매출액도 4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택건설 경기가 꺼진 1995년부터 매출이 40%나 급감했다. 한 대표는 "당시 악성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한밤중까지 쫓아다니고 외상 및 어음거래처를 없애며 거래처를 다양화해 위기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은 외환위기를 별 탈 없이 넘기도록 한 원동력이 됐다.

그렇지만 2001년 13억원을 투자해 경기도 화성시 1만㎡ 부지에 공장을 짓고 새로 시작한 보도블록 사업은 골칫덩이였다. 업체들 간 과당경쟁으로 보도블록은 팔아봤자 적자였고 미수금만 쌓여 경영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이 3년간 지속되자 사업을 정리하고 이민갈 생각으로 2004년 초 미국에 갔다가 우연히 들른 한 전시회에서 일본의 보도블록 생산설비 업체인 타이거사의 기타 하라 사장을 만난 것이 한 대표에게 전환점이 됐다. 다양한 모양으로 보도블록을 자동 생산하는 타이거사의 설비로 승부수를 던지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한 대표는 2005년 6월 35억원을 투입,타이거사로부터 성형틀로 1회 생산면적이 0.5㎡인 최신 설비를 들여왔다. 한 대표는 "당시 업계에서는 '망할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보니 미친 놈 아니냐'는 비난이 빗발쳤다"며 "하지만 완전자동 생산설비를 들여놓음으로써 24시간 가동이 가능해져 낮에만 생산하던 그 전보다 생산량을 3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처음엔 일본 기술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일반 보도블록과 달리 잘 부서지지 않는 고강도인데다 기능성까지 갖춘 특수보도블록을 독자 기술로 생산한다. 2006년 출시한 천연대리석과 같은 질감을 내는 '에코페이버'와 보행시 진동이 없도록 요철방식으로 결합하는 '베리어프리페이브' 등이 이 회사의 대표적인 특수 보도블록이다. 특수 보도블록만으로 출시 첫 해 1억원을 올렸던 매출은 2007년 15억원,지난해 110억원을 달성했다. 이 회사는 특수 보도블록이 자리를 잡자 2007년 10월엔 벽돌,지난해 초엔 일반 보도블록의 생산을 중단했다.

한 대표는 "올해 매출은 200억원으로 예상되는데 최근 새로 준공한 2공장이 본격 가동되는 내년에는 300억원을 돌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업계의 보도블록 기술력은 일본에 비해 평균 30년 뒤처져 있지만 우리 회사가 생산하는 특수 보도블록의 경우 기술력 격차는 3년 정도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해외 각국의 특성에 맞는 신제품을 개발해 해외시장 공략도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화성=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