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북부 쾰른에서 두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더 들어가면 귀테슬로역을 만난다. 인구 9만여명의 소도시 귀테슬로의 관문이다. '밀레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출구에 걸려 있는 간판이 방문객을 반긴다. 귀테슬로는 '밀레시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 11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프리미엄 가전기업 밀레가 있기 때문이다. 1899년 직원 11명으로 문을 연 밀레는 직원 수 1만6000명,연매출 4조원대를 달성한 오늘날까지 이 작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다. 직원의 평균 근속기간은 20년.이직률은 1%에 불과하다. 3~4대째 밀레에서 일하는 가정도 수두룩하다. 밀레는 생산기술자는 현지에서,연구개발(R&D) 전문인력은 전 세계에서 끌어들인다. 귀테슬로는 현지와 세계 인재를 녹여 제3의 인재를 만드는 용광로였다.

◆창의성이 세계적 가전 창조

전동모터를 단 세탁기(1914),진공청소기(1927),전기 식기세척기(1929),전자동 세탁기(1956),드럼세탁기(1958)… 세계 가전 역사에 기록될 밀레의 세계 최초 작품들이다. 지난달 베를린 IFA 전시회에서 선보인 식기세척기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물 8ℓ만으로 14명의 코스요리 식기를 완벽히 닦는 기술을 선보여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밀레의 신제품 역사를 가능케 한 것은 독창성이다. 내부 인재들의 창의성이 낳은 역사적 제품이라는 것.귀테슬로 본사에서 기자와 만난 마르쿠스 밀레 회장은 "퇴직 기술자와 기술개발 전문가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투자하면 전 세계 가정이 살 수밖에 없는 제품이 나온다"고 말한다.

창의성을 격려하는 회사 분위기는 시대를 앞서가는 제품 개발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안규문 밀레코리아 사장은 "밀레가 신제품을 선보이면 경쟁업체들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몇 개씩 사가서 뜯어보곤 한다"고 전했다.

너무 앞서 가다보니 시장이 미처 열리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 비운의 제품들이 있을 정도다. 밀레 회장은 "지금처럼 환경이 이슈로 부각되기 전인 1980년대 출시했던 환경친화적 진공청소기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했다. 식기세척기도 처음 개발됐을 때는 당시 가정부의 3년치 봉급에 맞먹을 정도로 비싸 시장성이 의심됐던 제품이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항상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결국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소비자를 알아라

귀테슬로라는 촌구석에서 밀레를 세계적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인재전략은 무엇일까. 척박한 촌구석은 인재 구하기에 악재가 될 터인데도 밀레 회장은 "오히려 인재의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단언한다. 오랫동안 한 지역에 머물다보니 퇴직한 기술자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깔때기처럼 모여들었다는 것."퇴직자, 전문가들과 긴밀하게 교류한 것이 밀레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밀레 회장은 말한다. 생산기술자들은 귀테슬로 출신이 많지만 연구개발 전문가는 세계 각국에서 오기 때문에 직원들의 주인의식과 전문가들의 아이디어가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제안된 아이디어는 내부 아카이브에 계속 쌓이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실제 제품 개선으로 현실화한다. "

생산기술자들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기술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도 마련돼 있다. 비생산직 직원 및 소비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뿐만 아니라,제품 개발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문제가 정말로 해결됐는가'를 끊임없이 검증한다. 세계 40여곳에 포진한 지사들을 통해 소비자 성향을 정교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다.

밀레 회장은 "얼마 전 식기세척기 안에 와인잔과 수저 · 나이프 · 포크 등을 두는 위치를 바꾸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제안됐는데,10개의 시제품을 소비자들이 써본 결과 다 별로라고 답해서 처음부터 다시 개발한 경우도 있었다"며 "소비자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제품의 질에 관해서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아요. 그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공유하는 밀레의 핵심 가치죠."

◆주인의식을 키워라

창의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회사의 일을 내일처럼 여기는 주인의식이라고 밀레 회장은 믿는다. 주인의식 없는 창의성은 자칫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밀레 공장에서 만난 페트라 라머씨(54)는 '가족정신(family spirit)'을 밀레정신으로 꼽는다.

그는 "회사 일을 내 가족 일처럼 여기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어서 작은 아이디어라도 있으면 당연히 제안하고 문제가 있으면 집에 들고 가서라도 해결하려 한다"고 설명한다. "몇 년 전 집에서 쓰던 밀레의 오븐이 잘 작동하지 않아 담당부서 기술자를 불러 문제를 파악하고 회사에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다. " 지시하고,압박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이다.

창의성과 가족정신은 '20년 보증제도'라는 자신감에 찬 소비자보호 제도로 나타났다. 밀레 회장은 "전통적으로 '20년 보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경영진의 원칙도 있겠지만 직원 개개인이 실제로 장인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1 ·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전거를 만들어 팔았던 밀레는 아직까지도 자전거를 잘 쓰고 있다는 감사편지를 받는다.

◆연구개발과 생산현장의 긴밀화

회사는 R&D 인력과 현장인력을 가급적 가까이 배치,창의성이 극대화되도록 한다. 귀테슬로 지역에는 '생산현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관련 R&D 센터가 있도록 설계됐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구인력들이 즉각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구인력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즉시 현장에서 시험해볼 수 있다. 밀레 회장은 "공장을 새로 설립할 때도 가급적 귀테슬로 인근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귀테슬로(독일)=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