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닛산그룹이 한국을 전기자동차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확정함에 따라 국내 전기차 산업이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현대 · 기아자동차는 이에 앞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앞당겨 2011년부터 전기차 양산(量産)에 나서기로 했다고 이달 초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 등의 자동차 업체들은 이미 전기차 생산에 본격 착수,한국이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따라잡기가 어려운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아왔다.

◆2차전지 경쟁력 덕 본다

르노닛산이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전기차 생산을 본격화할 거점으로 한국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는 전기차의 핵심인 대용량 배터리(2차전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2차전지 산업은 GM,BMW,포드가 한국 기술로 만든 배터리를 차세대 그린카에 탑재하기로 하는 등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배터리가 완성차 업체들을 끌어오고 있는 셈이다.

현재까지 전기차를 대량으로 생산할 만큼 안정적인 배터리를 내놓은 업체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가능성 측면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LG화학이 GM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전기모터가 주 동력,내연엔진은 배터리 충전용으로 쓰이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의 중간 단계)에 배터리를 납품하기로 했고,삼성SDI는 보쉬와의 합작사인 SB리모티브를 통해 BMW에 배터리를 공급한다.

중견업체 코캄이 세계 2위 자동차 부품 업체인 캐나나 마그나에 배터리 기술을 이전하기로 한 것도 주목받고 있다. 마그나는 포드에 배터리팩(배터리와 주변 전기장치를 포함한 유닛)을 독점 공급하기로 돼 있다.

르노닛산은 배터리가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닛산을 통해 일본 휴대폰 제조업체인 NEC와 제휴,자동차 배터리 생산업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닛산의 전기차 '리프'를 보고 온 부품업계 관계자는 "배터리가 미국 A123 제품이었다"며 "닛산이 아직 배터리를 독자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지난 8일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대로 현대 · 기아차가 후발주자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전기차 양산 시점을 1~2년 앞당긴 것도 배터리 기술에 대한 자신감 덕분이다. 현대모비스는 LG화학과 합작 법인을 만들어 배터리 기술을 더 진전시킬 계획이다.

◆국내 전기차 경쟁 촉발

전문가들은 르노닛산의 결정으로 한국 전기차 산업에 선순환 구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는 "현대 · 기아차가 2011년 양산 계획에 동의한 데에는 르노닛산의 결정이 지렛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경쟁에 불을 댕겼다는 얘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그린카와 관련,대학교수 등 국내 전문가 1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그린카 기술 경쟁력은 일본 미국 독일 등 선진 경쟁국 대비 74% 수준으로 약 5년 정도 뒤처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브리드카에서는 도요타 등 일본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클린 디젤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각각 유럽과 미국의 기술이 가장 앞서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검증이 필요하긴 하지만 중국이 BYD를 앞세워 전기차 산업을 육성하고 있는 것도 위협 요인"이라고 말했다.

현대 · 기아차와 르노삼성이 앞다퉈 전기차 개발에 주력한다면 5년 정도의 격차는 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GM이 중국과 한국(GM대우)을 그린카 생산 기지로 검토 중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산업은행이 1조원가량을 지원하는 대가로 GM은 GM대우에 전기차 개발 및 양산과 관련한 권한을 일부 넘겨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아직 갈 길 멀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을 더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린카 부품의 국산화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항구 팀장은 "전기모터는 국내에서 생산하지만 모터에 들어가는 특수 자석은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며 "배터리,모터,인버터 등 핵심 동력 부품만 국산화에 성공했을 뿐 기타 부품들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배터리에 들어가는 기초 화학물질 역시 일본산이 대부분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