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몰린 아일랜드 EU '울타리'로
[Focus] 정치적 통합마저? …'유럽합중국' 탄생하나
"생큐,아일랜드."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집행위원장)

유럽연합(EU)을 하나의 정치체제로 묶는 '리스본 조약' 비준동의안이 지난 2일 치러진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통과했다.

이제 EU가 미국과 같은 하나의 국가인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변모하는데 성큼 다가서게 된 것이다.

이미 세계 최대 경제블록인 EU가 정치적 통합마저 이루게 되면 국제정치 무대에서 '늙은 사자'로 불리던 구대륙의 발언권은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지난 3일 오후(현지시간) 아일랜드 정부가 발표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67.1%가 조약 비준동의안에 찬성,32.9%가 반대해 통과됐다.

16개월 전 아일랜드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선 찬성 46.6%,반대 53.4%로 부결됐었지만 1차 투표에서 반대했던 유권자 가운데 20% 이상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EU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며 찬성으로 돌아섰다.

브라이언 코웬 아일랜드 총리는 "아일랜드 국민은 물론 유럽에도 좋은 날이 됐다"고 말했다.

⊙ '유럽합중국' 탄생 가능성 높아져

EU 정치적 통합의 핵심 근거인 리스본 조약이 아일랜드 국민투표 통과라는 최대 난제를 넘어섬에 따라 EU의 정치적 통합은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리스본 조약은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 조약이 부결돼 무산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추진된 일종의 유럽연방 구성을 위한 조약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연합(EU) 개정조약(EU reform treaty)이다.

EU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2007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최종 합의해 공식 서명한 까닭에 '리스본 조약'이라고 불린다.

이 조약은 임기 2년6개월에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한 정상회의 상임의장(EU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외무장관에 해당하는 임기 5년의 외교정책 대표직을 만드는 등 EU 전체를 하나의 국가처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EU는 EU 회원국이 6개월마다 돌아가며 순회의장국을 맡는 등 '지도자'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다.

조약의 핵심 중 하나는 의사결정 방식을 종전 만장일치제에서 이중다수결제로 바꾸는 것이다.

EU 전체 인구의 65% 이상,27개 회원국 중 15개국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되는 제도다.

27개 회원국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도 신속히 의사 결정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명실공히 단일 정치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대신 공동체에서 탈퇴하고자 하는 회원국은 정상회의에 탈퇴 의사를 통보하고 유럽의회의 동의를 얻은 탈퇴협정에 이사회가 서명하면 합법적으로 결별할 수도 있게 된다.

⊙ 체코 · 폴란드까지 서명하면 내년 발효 가능

그러면 왜 이렇게 중요한 조약의 통과 여부가 아일랜드에서 결정된 것일까?

이유는 리스본 조약은 27개 회원국 전체가 찬성해야 발효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인 국민투표 없이 대의민주주의제에 따라 의회 · 정부가 자체적으로 비준 절차를 거쳤다.

이 조약은 당초 2008년 회원국들의 비준 절차를 거쳐 통과되면 2009년부터 발효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8년 6월 국민투표를 실시한 아일랜드에서 부결돼 일정이 일년 이상 늦어졌다.

아일랜드는 25번째로 비준에 찬성한 국가가 됐으며 남은 곳은 체코와 폴란드뿐이다.

체코 · 폴란드는 모두 리스본 조약이 국회를 통과하고 대통령 서명만을 남겨 놓고 있으며 서명을 미루고 있는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의 행보가 마지막 관문으로 남을 전망이다.

하지만 유럽 내 통합여론의 압력이 적지 않아 결국 연내 통과될 확률이 높다.

폴란드와 체코에서 비준이 연내에 마무리될 경우 내년 1월1일 리스본 조약이 발효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EU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돼 미국 ·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플레이어' 위상을 확고히 하게 된다.

⊙ 아일랜드인들은 왜 찬성으로 돌아섰나

16개월 전 리스본 조약 국민투표를 부결시켜 유럽합중국 출범을 벼랑 끝으로 몰았던 아일랜드가 이번에는 큰 표 차이로 조약을 통과시킨 배경에는 아일랜드를 강타한 경제위기가 있었다.

한때 규제완화와 감세를 무기로 '캘틱 타이거'로 불리며 세계경제의 기린아로 꼽히던 아일랜드는 지난해 말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금융권이 파산하고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유럽의 중환자'로 전락했다.

특히 최근 다른 유럽국가들이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과 달리 아일랜드는 실업률이 15%를 넘어서는 등 여전히 회복의 싹이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EU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마케팅 컨설턴트인 피터 글린씨(30)는 "조약에 찬성해야만 유럽연합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이끌어내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더블린 인근 어촌마을 호스의 브리드 밀튼씨(67)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유일한 희망은 EU"라고 밝혔다.

작년의 실패 이후 정부와 정치인 · 기업들의 일관된 리스본 조약 홍보 노력도 큰 몫을 했다.

여당인 피아나페인과 야당인 노동당 · 녹색당은 한 목소리로 국민투표 찬성 캠페인을 벌였다.

아일랜드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기업 인텔과 유럽 저가항공사 라이언에어 등은 엄청난 홍보비를 들여 국민들에게 찬성표를 던져야 경제가 산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블린 시내 스코일 초등학교 투표장에서 만난 메리 디건씨(29)는 "작년엔 아무도 리스본 조약이 뭔지,왜 찬성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올해는 조약에 관해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릴 정도"라며 "유럽연합과 아일랜드가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찬성표를 던졌다"고 설명했다.

더블린=이상은 한국경제신문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