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카메라 돌았나요? 레디~액션!"

일본 관광객들로 붐비는 서울 명동 한복판.영화 촬영이 한창이다. 이상한 안경을 쓴 한 청년이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닌다.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의 손에 들린 빵을 훔쳐 먹는가 하면,여자속옷 가게에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훑는 변태적 행위까지.멀리서 그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스태프들.물론 스태프라 해봐야 감독 카메라맨을 포함해 5명 남짓이다. 속옷가게 등 촬영장소도 점포 주인에게 애걸하다시피해 섭외한다.

영화 '이상한 안경'은 우연히 줍게 된 이상한 안경으로 인해 투명인간으로 변해버린 소심한 청년의 이야기다. 덕분에 주인공을 맡은 정우진씨(미디어 파트)는 쌀쌀한 가을날 체육복 한벌만 입고는 사람 가득한 명동 바닥에서 온갖 기행을 펼쳐야만 했다. 얼핏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졸업작품을 찍고 있구나'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바로 삼성화재 사내 영화제작 동호회 '을지로극장' 회원이다.

2008년 1월 첫 모임을 가진 '을지로극장'은 40여명이 모여 시작한 순수 아마추어 영화 제작 동호회다. 동호회를 처음 만들 땐 말이 많았다. "우리가 무슨 영화를 만든느냐""영화나 보고 술이나 마시자" 등 영화 제작에 회의적인 회원이 많았다. 하지만 창작에 관한 열정만 믿고 일단 찍어보기로 했다.

모두가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 교육이 필수다. 정기적으로 현업에 있는 영화감독이나 프로듀서들을 초청,2~3시간가량 강의를 들었다. 연기 촬영 편집 등 여러가지 교육 중 연기수업이 가장 인기였다. 실제 연극배우를 초청해 호흡부터 감정 처리까지 1 대 1로 연기 지도를 받는다. 주로 남양주영화촬영소의 넓은 잔디밭에서 수업을 하는데,회원 가운데 기혼자가 많기 때문에 가족모임 뒤풀이를 하기도 한다.

시나리오는 회원들이 직접 쓴다. 새 시나리오가 나오면 회원들이 읽어본 뒤 올해 제작할 영화를 투표하게 된다. 올해는 8편의 시나리오가 접수돼 뜨거운 경쟁을 벌인 끝에 3편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작년엔 첫해라 많은 시행착오 끝에 3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렇게 만든 영화를 들고 연말에 본사 대형 회의실에서 조촐하지만 영화제를 열었다.

작년 영화제의 슬로건은 '일상의 기적을 꿈꾸다'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영화도 만들고 영화제까지 하는 것이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회의실 입구엔 레드카펫을 깔고 여주인공들은 저마다 드레스를 맞춰 입고 포토존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촬영도 했다. 영화제는 가족과 직장동료 등 200여명이 몰려 성황리에 치러졌다.

일반적인 인터넷 카페나 사내 동호회 중 영화감상이나 비평을 목적으로 하는 동호회는 많지만 직접 제작을 하는 동호회는 생소한 게 사실이다. 그만큼 영화 제작은 전문적인 분야이기도 하고 기술적인 면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최근 '워낭소리'나 '똥파리''낮술' 같은 독립영화가 주목받으면서 제작에 대한 동료들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입소문으로 동호회를 알게 된 직원들이 참여하겠다고 문의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늘고 있다.

누구나 일탈을 꿈꾸고 더 새로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은 그것을 방해한다. '을지로극장'은 그런 지루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는 실험의 장이 되고 있다. 올해도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몸을 부딪치며 3편의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한편 한편의 영화엔 회원들이 꿈꾸는 삶과 이상,안타까운 현실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는 11월 서울 삼성화재 본사에서 '을지로극장'의 두 번째 영화제가 열린다. 인터넷 카페(cafe.naver.com/ejrt)를 찾으면 자세한 소식을 볼 수 있다.

/최상진 '을지로극장' 회장(홍보팀 미디어파트 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