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지난달 30일 '2010 봄 · 여름 패션위크'(파리컬렉션)가 개막했다. 샤넬 · 디올 · 루이비통 등 쟁쟁한 명품 패션하우스를 비롯해 비비안 웨스트우드,스텔라 매카트니,알렉산더 맥퀸,소니아 리키엘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내년 봄 · 여름 시즌 유행할 여성복을 오는 8일까지 선보인다. 이 가운데 한국 디자이너 이상봉이 컬렉션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파리에서 활동 중인 문영희 디자이너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온 여성복 디자이너로는 유일하다.

패션위크 둘째날인 지난 1일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에서 이상봉의 눈부신 무대가 펼쳐졌다. 몇 달간 밤샘 작업 끝에 준비한 60여벌의 의상이 런웨이를 지나가자 각국에서 몰려든 300여명의 바이어와 프레스의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그는 국내에서는 26년 경력의 베테랑 디자이너이자 연예인 이상으로 유명하지만,진출 10년째인 파리에서는 아직 '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파리로 출발하기 직전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의상들을 준비했나요.

"주제를 '조각과 인간에 대한 소통 또는 관계'로 잡았습니다. 인체를 조각화해서 디자인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한 조각가 박승모씨와 콜라보레이션(협업)으로 무대를 꾸몄습니다. 주제에 맞춰 장소도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으로 잡았습니다. 컬렉션 장소로는 흔치 않은 곳이죠.고가 예술품이 걸려 있는 갤러리에 무대를 세우다 보니 경호원을 고용하고 작품에 보험까지 들어놨습니다. 저는 '한글' 디자인을 선보인 이후 컬렉션마다 한 가지 이상 한국적인 디자인을 내놓고 있는데 지난 시즌 '미인도' '호랑이'에 이어 이번엔 '산수화'를 모티브로 만든 프린트 의상들을 소개합니다. "

파리컬렉션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파리를 비롯해 밀라노 · 뉴욕 · 런던이 세계 4대 컬렉션으로 꼽히지만 이 가운데 파리컬렉션은 최고 권위를 자랑합니다. 파리컬렉션을 통해 유행 경향,시장 규모 등 그해의 세계 패션시장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양과 질적인 면 모두 세계 최고의 리딩 브랜드들이 참여하는 '패션시장의 리더'라고 할 수 있죠.비비안 웨스트우드,존 갈리아노 등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도 뜨기 시작하면서 모두 파리로 옮겨 왔어요. 제가 처음 파리컬렉션에 참가했을 때만 해도 70개이던 브랜드 수가 지금은 100여개로 불어났고 패션위크 기간도 7일에서 9일로 늘었습니다. "

파리컬렉션에 진출한다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인가요. .

"컬렉션에 참가하는 데 특별히 까다로운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으면 파리 패션위크를 전담하는 에이전시를 통해 신청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매년 기존 디자이너들의 일정이 빡빡하게 채워져 있어 비는 스케줄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보통 신인들은 메인 쇼보다는 오프 쇼로 데뷔해 능력을 평가받습니다. 이후 에이전시와 공식 계약을 맺으면 이들이 장소 섭외,일정 등을 모두 챙겨줍니다. 솔직히 디자이너에겐 비용 문제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죠.패션쇼를 한 번 열려면 장소부터 모델,의상 제작까지 최소 1억원 이상 듭니다. 샤넬 · 디올 등 유명 패션하우스들은 수십억원을 쏟아부어 화려한 무대를 꾸미죠."

공백기간 없이 8년 연속 무대에 작품을 올리고 계신데요.

"해외 시장에서는 컬렉션을 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컬렉션을 할 여유가 없다면 반드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해야 하죠.디자이너에게 공백기는 그동안 쌓아온 바이어들을 다 잃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파리 패션위크 개막 전 수천개 브랜드들이 참여하는 제품 전시회가 열려 세계 각국 바이어들과 거래가 이뤄지죠.이에 반해 '패션의 꽃'인 컬렉션은 단 100여명의 디자이너에게만 기회가 주어져 의미가 각별합니다. 요즘엔 파리 패션위크가 연 4회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각 시즌별 두 차례 컬렉션(봄 · 여름,가을 · 겨울)과 그 중간에 프리 컬렉션이 있습니다. 그러니 1년 내내 작업해야 하는 상황이죠.특히 명절(추석)과 겹치는 시기에 컬렉션이 열리다 보니 지난 8년간 한번도 제때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성복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참가했는데요.

"자신이 만든 옷을 팔지 못하면 디자이너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해외에 판매처가 없으면 패션지에서도 다뤄지지 못해 도태할 수밖에 없어요. 우선 시장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남성복은 우영미 · 정욱준 · 송지오 등 국내 디자이너들이 눈부신 성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성복 부문은 워낙 쟁쟁한 패션하우스들이 파리에서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어 뚫기가 힘듭니다. 또 남성복 아이템은 재킷,팬츠,셔츠 등 비슷비슷하지만 여성복에선 한국과 유럽의 TPO(시간 · 장소 · 용도)가 상당히 다릅니다. 특히 드레스가 그렇죠.유럽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국내에선 흔한 아이템이 아니거든요. 이런 정서적인 차이까지 감안해 국내와 해외 시장을 겨냥해 별도로 디자인을 하다 보니 한국 디자이너에게는 걸림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파리컬렉션에 진출했던 많은 여성복 디자이너들이 지금은 해외 진출을 포기한 상태죠.저는 틈새를 노렸어요. 오트쿠튀르(맞춤복)와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사이를 겨냥한 옷을 만들어 팔고 있죠."

일본과 달리 국내에서 아직까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나오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처음 파리컬렉션에선 러시아나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런던과 일본 출신 디자이너들이 꽉 잡고 있습니다. 1980년대 요지 야마모토,콤데가르송 등 일본 디자이너들이 큰 성공을 거둔 뒤 그 수제자들이 명성을 이어가고 있죠.하지만 한국은 1990년대 초반 디자이너들이 도전했다 실패하고 난 뒤 명맥이 끊겼어요. 물론 디자이너의 개별적인 파워도 중요하지만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힘이 필요합니다. 저도 은퇴 후에는 제 뒤를 이어갈 후계자를 양성하려고 해요. 또한 국력도 상당히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시장성과 경제력은 한국의 5배 이상이라 그만큼 세계 패션시장을 이끌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육성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까.

"한국만큼 정부 지원이 많은 곳은 없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관련 기업들이 디자이너 육성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어요. 기업들은 적게 투자해 단기간 많은 성과를 거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브랜드나 디자이너들이 해외 무대에서 크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단발적으로 지원금을 주고 생색내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성장하도록 진출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게 가장 시급해요. "

파리 진출을 꿈꾸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꼭 조언해줄 말씀이 있다면.

"국내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쌓은뒤 해외에 도전하는 게 순서입니다. 패션시장의 시스템을 충분히 파악하기 전에 무턱대고 외국 전시회나 컬렉션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죠.하지만 대부분 자금력 때문에 주저앉게 됩니다. 바이어들에게 많은 양을 주문받아도 석 달 내에 만들어 보내야 하는데 경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죠."

앞으로의 계획은.

"세계 무대에서 '이상봉(Lie sang bong)'이란 브랜드는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시장을 확대해 보려고 합니다. 파리컬렉션이 끝나면 바로 쿠웨이트를 방문합니다. 처음으로 단독 매장을 내겠다는 바이어를 만나기 위해서죠.중동시장에선 쇼핑 명소로 통하는 유명 멀티숍에 제 옷들이 진열돼 있을 만큼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또 미국 시장에서도 이상봉 쇼룸을 열어 본격적으로 판매할 것입니다. "

글=안상미/사진=김영우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