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토리 키드'.권찬용 성산 대표의 별명이다. 공장 지대였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인근에서 태어나 쇳조각을 장난감 삼아 컸다. 중 · 고교 시절에는 방학마다 아버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독 기계뭉치가 좋았다. 지금도 기계밥으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어려서부터 기계 쪽으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어요. 대학(동양공전 기계설계)도 결국 그 길로 갔고요. "

그런 그였지만,회사의 대표 자리는 원래 그의 몫이 아니었다. 한 살 위인 형님이 있었다. 고교 졸업 직후부터 아버지 사업에 뛰어들어 일찌감치 가업을 잇기로 돼 있던 형님은 14년 전 겨울,새벽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여섯 살 어린 남동생은 신부가 됐다.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아버지는 부품 가공에 필요한 선반이나 밀링머신을 살 때도 꼭 두 개씩 샀었다. "나중에 사업을 물려받으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 가지라"는 뜻에서였다.

기술자로 사는 게 꿈이었던 권 대표는 입사 초년병 시절,뜻이 맞지 않는 기술직 직원들과 멱살잡이를 할 만큼 혈기 왕성했다.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어려서부터 공장일을 했고 대학에서 기계를 배웠는데,인정하지 않았아요. 직원들은 술값 낼 때만 나를 사장 아들로 취급했지 업무에서는 말단 사원으로 취급하더라고요. "

권 대표는 "고민 끝에 직원들과의 갈등을 1대1로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소주 3~4병 정도는 한자리에서 비우곤 했던 그의 술실력이 이때 발휘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론과 현장의 차이를 깨닫게 되고,구식 경영시스템을 하나 둘 뜯어고치자 그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뢰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너 2세'로 인정하지 않던 당시의 직원들과는 지금 가족처럼 지낸다.

그의 꿈은 코스닥 상장이다. 내년 올해의 2~3배 이상으로 외형이 커질 것으로 그는 확신하고 있다. 해외 진출 가능성도 밝다. 이미 2년 전부터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으로 한 달에 서너 번씩 출장을 다니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동안 뿌린 회사 소개서만 3000여장.그 결실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현재 가격 조건을 협의 중인 물량만 100억원어치가 넘을 정도."지금까지 30년은 신뢰를 쌓는 시기였어요. 앞으로는 도약의 시기가 될 겁니다. 4~5년 내에는 상장도 가능할 겁니다. 그게 '삼성처럼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형의 꿈이기도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