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에 대한 잘못된 정의(定義)가 불러오는 혼동 중의 하나가 국회의원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국회가 법을 많이 만들면 일을 잘한다고 착각한다. 경실련 같은 시민단체들이 국회의원별로 입법 건수를 집계해 발표하고 법안을 내지 않거나 적게 낸 국회의원들을 마치 일을 안하는 사람인 것처럼 치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경실련은 그런 분석자료를 내놓았다. 수준 있다는 교수단체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국회를 입법부라고 부르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만이 법률을 만드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 회사원이 출근해서 주어진 과업을 처리하듯이 매일매일 새로운 법을 생산해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읽어보지도 않고 한꺼번에 통과돼 쏟아져 나오는 법률에 의해 온갖 생활을 규제받는 국민이나 기업의 처지를 생각하면 여간 딱한 일이 아니다. 또 이런 법률에 따라 준엄하게 재판해야 하는 사법부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일회성 여론 조사표를 버리는 쓰레기통에 국가의 장래와 시민의 권리까지 함께 쏟아버리는 짓에 다름 아니다. 신문사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법전들은 쏟아지는 법률과 시행령과 규칙들을 갈아 끼우느라 온통 누더기다. 법제처 용역 직원이 주기적으로 한 보따리 서류더미를 들고와 온 서가를 뒤지며 손가락이 안보일 정도로 숙달된 솜씨(?)로 새로운 법률들을 낱장마다 갈아끼우는 장면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저 엄청난 부피의 종이 쪽지들 속에 수많은 엉터리 법률들이 끼워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이 사생활의 자유를 잠식하고, 재산권을 훼손하는 것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국민의 대표권을 가졌다고 아무 법이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놀라운 입법 만능적 착각이다. 결국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더 걷고, 이리저리 개인의 재산권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고, 허가하고 심사하고, 공무원의 권한을 확대하고, 개인의 자치를 부인하고, 심지어 나라의 수도를 제멋대로 충청도로 갖다 붙이고, 시장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복잡다단한 비정규직을 일률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명령하고, 심지어 멀쩡한 성인들이 이혼을 하려는데도 국가가 나서서 "좀 더 생각해볼 것"을 엄숙히 명령하는 그런 법도 아닌 법을 양산하는 것을 나는 환영할 수 없다.

최근의 법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국민에게 무언가를 명령하는 처분적 법률들이며 그만큼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민간 자율의 원칙을 유린한다. 해머를 들고 국회를 때려부수는 18대 국회 들어 발의된 법률안만도 4600건에 달한다니 숨이 막혀온다. 누구에겐가 특혜를 주거나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더기로 국회를 통과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결과가 바로 법에 대한 무시요 법 의식의 실종이다. 급기야 법에 대한 존중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법률이 잘못되었다며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기하는 건수가 매년 급증하고 있는 것도 그런 증거의 하나다. 2003년 1000건을 돌파한 헌법소원은 2005년에 1500건에 육박했고 2007년에는 1742건을 기록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작년에 일시 1100건으로 뚝 떨어졌지만 법이 잘못되었다거나 법이 엉터리라는 주장이 그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에 대한 거부요, 준법의 부정이며, 법에 대해 대중정치가 우위에 선 오도된 결과다.

국회의원들이 열심히 법 만든다고 부산을 떠는 장면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입법 만능주의야말로 사법과 입법을 엄격하게 분리한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독소 중의 독소다. 제멋대로의 법을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도끼로 문이나 부수고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논설위원 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