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제약사의 한 고위 임원을 최근 만났다. 그는 "상반기에는 그런대로 버텼지만 앞으로가 큰 일이다. 내년에는 정말 곡소리가 날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제약업계가 이처럼 패닉 상태에 빠진 데에는 사정이 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의약품 가격 및 유통 선진화 TFT'를 통해 건강보험 재정 지출 절감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정부 목표가 건보 지출액의 29%를 차지하는 10조원의 약제비를 8조원으로 줄인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라는 인하 수치는 제약사 매출의 20%가 리베이트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추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근거는 불명확하다. 설령 접대비,판촉비,학술비 전액을 불법 리베이트에 쓴다 치더라도 이는 전체 상장 제약사 매출의 8.39%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약협회 측 설명이다.

더 큰 문제는 TFT가 검토 중인 약가인하 방안이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점이다. 현재 다국적 제약사가 생산해온 오리지널 신약의 특허기간이 끝나면 보험약가가 20% 깎이며 이를 모방해 만든 국내 제네릭 5개 제품은 당초 오리지널 가격의 68%를 인정받는다. 이르면 내년부터 특허기간이 만료된 오리지널 약가를 제네릭과 똑같이 50% 수준으로 낮추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약값이 동일하다면 관행상 의사들은 오리지널 약을 집중 처방할 것이다. 외국사보다 국내 제약사의 손실이 더 커질 것은 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다. 정부는 병의원이 보험약가보다 싼 값에 약을 사서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하면 차액의 일정 부분을 되돌려주고 싸게 팔린 금액만큼 약가를 떨어뜨릴 방침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 발생은 필연적이다. 전문의약품을 대량구매하는 대형병원의 약가 할인 요구를 거절할 제약사는 없다. 모든 제약사가 할인경쟁에 나서면서 공멸의 길로 치달을수 있다는 얘기다.

보험약가에 거품이 끼어있다면 이를 해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교각살우'와 다를 바 없다. 이미 3년 전부터 보험약가를 단계적으로 깎는 '약제비적정화방안'이 시행 중인 실정에서 추가적인 약가인하장치까지 도입된다면 매출 감소로 인한 수익성 악화는 신약 개발 의지 실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내 제약산업 기반이 무너진다면 국제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신종플루 백신을 생산키로 한 녹십자와 같은 회사가 더이상 존재할수 없게 된다. 토종 제약사의 몰락은 7만2000여명에 이르는 일자리를 위협함은 물론 제2의 신종플루 발생 등 유사시 각종 신약을 보유 중인 다국적제약사에 대한 정부의 협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다.

1999년 국산 신약 1호가 나온 뒤 지금까지 15개의 신약이 나왔다. 의약품 선진국 시장을 개척하려는 업계의 노력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8월부터 리베이트가 적발되면 해당 제품 약가를 20% 낮추기로 한 정부 조치가 시행 중이다. 리베이트 규제대책의 효과를 지켜본 뒤 합리적인 약가개선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약제비 절감분은 건강보험료를 낮추고 제약업계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제약사만 보험재정 안정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불공평하다. 더이상 동네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약가 인하에만 급급한 나머지 차세대 성장동력을 내팽개칠 셈인가.

최승욱 과학벤처중기부장 s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