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을 뚫고 기업 최고 자리에 올랐던 전직 최고경영자(CEO)들이 화가와 사진 작가로 잇따라 변신하고 있다. 경영과 미술이 '도전과 열정'이라는 코드로 통하는 데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다는 점이 CEO들을 예술가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퇴직 후 사진 작가로 왕성한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는 이해욱 전 KT사장을 비롯해 강석진 전 GE코리아 대표,이서형 전 금호건설 사장,이성구 전 농심기획사장,강웅식 전 아메리카스탠다드코리아 회장,강현두 전 스카이라이프 사장,홍영주 전 포스코 중남미 지사장 등이 미술계에서 인생2막을 살고 있는 대표적 CEO들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50여년간 잔뼈가 굵은 이해욱 전 KT사장은 사진 작가로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통신산업의 태동기 시절 집전화 자동화(전자식교환기 개발)를 비롯해 인공위성 1호(무궁화위성)발사 ·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등에 핵심 역할을 한 그가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KT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20여년간 세계 188개국을 여행하며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가 배인 풍물,인물,풍경 사진을 찍어왔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만도 수 천점에 달한다. 이 중 최근 4년간 가나,세네갈 등 아프리카 중서부를 비롯해 남태평양 지역 등을 돌면서 촬영한 사진 40여점을 모아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KT 사옥 1층 KT아트홀에서 전시한다.

GE코리아에서 30여년간 근무하면서 '외국계기업 대부'로 통했던 강석진씨(71)는 2002년 퇴임 후 전업 작가로 제2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GE코리아 재직시절부터 작품활동을 하며 탄탄한 구상회화 실력을 갖춘 그는 18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서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1995년부터 7년간 금호건설 CEO를 지낸 이서형씨(67) 역시 퇴임 후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2002년 은퇴한 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인대 회화과 3학년에 편입했고,지난해에는 대학원까지 마쳤다. 어린시절 꿈이 화가였는데 화가의 길이 돈이 많이 들어 포기했다가 노년에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현재 그는 경기도 용인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하며 내년 초에 열릴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전업작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CEO 자리에서 물러난 경우도 있다. 이성구씨(60)는 제일기획 전무를 거쳐 농심기획 대표이사까지 올랐지만 2005년 더 늦기 전에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전격 사퇴했다. 그는 내년 4월21~29일 서울 인사동 조형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어 풍경 및 인물화 작품 140여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강현두 전 스카이라이프 초대 사장(72),강웅식 전 아메리칸스탠다드 코리아 회장(70) 등도 퇴직 후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하며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은 이달 초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CEO,그림에게 말을 걸다'라는 주제로 그룹전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퇴직 후에도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예술 창작에 뛰어든 것은 못다 이룬 꿈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정 때문"이라며 "그동안 상품이나 서비스로 대중과 소통하는 이들이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은 셈"이라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