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거 제대로 알고나 쓴 건가. "

지난 5월 어느날 아침.한 조간신문을 집어든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실무자를 불러올려 지시를 내렸다. "내일부터 회사에 들어오는 ○○일보 다 끊어버리세요. " 이러고도 모자랐던지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다시는 그 신문을 보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인 LED TV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은 데 따른 분노였다. 삼성 TV를 명실상부한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윤 사장의 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해 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시장에서 삼성이 TV 판매 대수로는 1위를 했지만 판매 금액에서는 2위에 그쳤다. 회사 내에서는 1위가 되기 위해 가격을 인하하더라도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윤 사장은 "우리 제품은 그런 가치에 팔 물건이 아니다. 제값을 받아 1등을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삼성은 판매 대수,판매액,대당 판매가격 등 모든 지표에서 1위를 달성했다.

처음부터 그가 독한 승부사였던 것은 아니다. "청년 윤부근은 때가 덜 묻은 한적한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꿈을 찾아 섬을 탈출하다

1968년 11월 어느날.

울릉도에서 태어나 줄곧 섬에서만 살던 울릉수산고 2학년 윤부근은 결단을 내렸다. 당시 그 학교를 졸업해 갈 수 있는 최고의 학교는 여수 수산전문대였다. 약국을 하던 부모님을 보면서 의사의 꿈을 꾸던 윤부근으로선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대구로 나왔지만 거처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잡은 곳이 중구 대봉동의 '대봉 독서실'이었다. 몇 개월간 독하게 공부했다. 그래서 발에는 항상 고무신이 신겨져 있었다. 독서실에서 앉아서 먹고 자고 공부하느라 발이 부어서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대구 대륜고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고교를 5년이나 다닌 것이다. 하지만 의사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고려대 의대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고교를 5년이나 다닌 마당에 재수할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후기였던 한양대 전자공학과였다.

인생은 이렇게 우연찮게 경로를 바꾸곤 한다. 윤부근은 또 다른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한눈 팔지 않고 공부했다. 산업현장의 엔지니어로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즈음이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열중한 결과 1978년 11월6일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했다.

어디서든 기회는 있다

입사해 처음 한 일은 3인치,5인치 TV 개발이었다. 말이 개발이지,그가 한 일은 사용설명서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쓰는 것이었다. 품목,규격이 들어가 있는 매뉴얼을 모두 손으로 적었다. 손에는 어느새 굳은 살이 자라났다. "이런 허드렛일을 하러 삼성에 들어왔나"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루틴이야말로 바닥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과 시야를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친 것은 개발팀 과장 시절.당시 그는 PAL 방식(유럽 컬러TV 전송 방식)의 TV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방식은 시장이 작았기 때문에 같은 팀내에서도,팀장으로부터도 홀대받고 있었다. 윤부근은 그런 차별대우를 참을 수 없었다. 같은 회사,같은 팀내에서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었는데….참다 못해 사표를 써버렸다.

당시 문병대 인사담당 이사가 그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삼성이 얼마나 커갈 회사인데 자네 같은 사람이 그만둔다고 하느냐.여기에 둥지를 틀어야 한다. " 그 말에 사표를 다시 거둬들였다. 오늘의 윤부근을 있게 만든 첫 번째 은인인 셈이다.

엔지니어에게 개발팀은 승진 코스였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인도네시아 현지공장 설립 태스크포스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개발팀에서 현지공장으로 나가라는 것은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외 근무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를 거쳐 유럽연구소에서 5년을 더 보내고,1996년 다시 개발팀으로 돌아왔다.

1999년 임원으로 승진한 뒤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던 그에게 또 다른 인사명령이 떨어진 것은 2000년 초였다. 느닷없이 경영혁신팀으로 발령이 난 것.개발팀에 비하면 빈약한 조직에 각광도 받지 못하던 업무였다. 사람들은 "윤부근이 물을 먹은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배움의 기회를 만들었다. 윤 사장은 "2007년 사업부장을 맡고 보니 경영혁신과 개발업무를 거쳤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며 회사에 고마워했다.

안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은 최지성 삼성전자 DMC 총괄사장이다. 초기 관계는 무척 껄끄러웠다. "처음 최 사장의 지시를 받았을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았어요. 막무가내성 요구들도 있었거든요. " 어느덧 윤부근 개인 최대의 현안은 최 사장의 지시나 간섭을 안 받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최 사장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스스로 뭔가를 먼저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됐다.

하지만 최 사장은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마케팅의 대가였다. 윤 사장은 "최 사장은 해외에서 이쑤시개 시계 신발을 팔던 사람이었다. 그는 판매가 뭔지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최 사장 앞에서 그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더 이상 깨지는 것이 싫었다. 그런 최 사장과의 강력한 '텐션'이 삼성전자 TV를 세계 최고로 올려놓은 기폭제가 됐다.

윤 사장은 1등을 하고 보니 비로소 'I can do'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아마 그 정신은 지금의 위치를 지키는 원동력이 될 게다. "사업을 할 때 어떤 회사나 주어진 환경은 똑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변하게 되고,거기에 출구(솔루션)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

월급쟁이 최고의 덕목은 주인의식

입사 후 몇 달 지난 뒤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한다. 회사가 출신 지역이나 학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희귀한 울릉도 출신 신입사원의 꿈은 이때 시작됐다. "부사장까지는 노력과 실력으로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사장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봤지요. " 그런 생각으로 달려온 지 30여년이 지난 올해 초,마침내 삼성전자 사장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는 이를 "운구복일(運九福一)"이라고 표현한다.

윤 사장이 직장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 것은 주인의식과 신뢰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내 회사라는 생각으로,내 사업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일부 후배들은 호황일 때와 위기일 때 한결같은 태도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한다. 신뢰도 중요시한다. 그는 "때가 덜 묻어서 그런지 신뢰가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별로 정이 안 간다. 그리고 좋건 싫건 그 표현을 확실히 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그런 성격은 사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경쟁 업체가 어디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직설적으로 공격하곤 한다. "실력이 없으면 그걸 인정하고 넘어설 생각을 해야지,그걸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헐뜯는 경쟁 상대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 이런 생각은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1등을 존중하고 배우는 게 아니라 헐뜯고 깎아내리는 풍토를 갖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돈은 필요한 만큼 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윤 사장은 "돈을 좇다 보면 성공해도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돈은 따라오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 벌어야지 그 이상 벌면 (인생이) 무너진다"는 것.그런 면에서 삼성은 일하는 만큼 주는 조직이라는 게 그의 평가다. 윤 사장은 직장인으로서 "뭔가 배울 게 있는 선배,TV 일류화에 기여한 선배로 평가받고 싶다"고 말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사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