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북부의 드라흐텐시는 2006년 말 교통 신호등과 법규를 없앴다. 유일하게 남긴 것은 우측통행 우선 규칙.운전자든 보행자든 알아서 질서를 만들어가다 보니 초기엔 혼란이 극에 달했다. 운전자는 도로 전체가 횡단보도가 됐다며 불평했고,보행자는 차를 피해 다니느라 바짝 긴장해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벌어졌지만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교통사고가 급감한 것이다.

2007년에는 독일 북서부의 봄테시가 뒤따랐다. 신호등과 교통법규를 없앤 대신 차도와 인도,자전거 도로를 선으로 구분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자갈을 깔아 자동차의 속도를 줄인 게 안전 대책의 전부였다. 역시 혼란이 있었지만 사고는 확 줄어들었다. 운전자나 보행자가 서로에게 더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시티가 나섰다. 이곳은 버킹엄 궁전,국회의사당,트래펄가 광장 등이 몰려 있어 차와 인파로 붐비는 도심이다. 그런데도 시 의회가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일대의 신호등을 2주간 꺼버리는 실험을 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대신 CCTV 등으로 상황을 점검하게 된다. 효과가 있으면 100여개의 신호등을 철거할 계획이다.

신호등을 없애 교통사고를 줄인다는 발상은 네덜란드 교통전문가 한스 몬더만의 교통관리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운전자들은 도로를 '자신 위주'로 인식해 교통신호나 도로 표지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신호체계를 없애면 불안감을 느껴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는 논리다. 몬더만은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터들이 자유롭게 움직여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자동차 홍수 시대에 신호등을 없애는 건 모험에 가깝다. 도로폭이 좁고 보행자가 많은 유럽에서 효과가 있을 뿐 어디에나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 등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EU는 이를 도입하는 도시에 보조금까지 지급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교통사고로 인한 보행자 사망자수 1위(10만명당 5.28명,한국교통연구원)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우리도 일부 도로에 이를 도입해 보면 어떨까. 좀 혼란스럽고 불편하겠지만 사고가 줄어든다니 하는 얘기다. 도로가 자동차 전유물이 아니라 보행자와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인식만 자리잡아도 그게 어딘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